잉카의 수도 꾸스꼬 아름다운 도시 - 남미 페루에 위치한 고도 3000m도시
페루 잉카의 수도 꾸스꼬 도시 해발 3000m 이곳은 천천히 걸어도 숨이차다. 아주 작은 골목길을 우리나라 마티즈가 거침 없이 누비고 다니는곳이기도 하다. 저런 길을 어떻게 갈까.. 일행이 많으면 한줄로 서서 가야 하는 3000m의 고도에서 아주 작은 골목길을 저리도 막 달릴 수 있을까 정말 꾸스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운전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한다. 마티즈가 택시로 둔갑해서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는가 하면 우리나라 미니버스정도 되는 차도 좁고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거침없이 내 달린다. 이곳의 숙소는 주인장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담은 높고 자물쇠로 몇겹이 잠겨 있는지.. 묵직한 통나무 대문은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도둑들을 막기 위해 설치된것 같은.. 화장실은 한사람이 들어 가면 꽉 차서 돌아서기도 어려울정도.. 그래도 청결하게 정돈되어서 장식을 해놓은것을 보면 사람들이 상당히 정이 있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손 끝이 매서운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고도 3000m 넘는 이곳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산책를 할려는데 아래의 아가씨가 라마를 데리고 나와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각없이 카메라셔터를 눌렀다. 돈을 달라고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페루 돈으로 주었더니 아예 자세 까지 잡아 주면서 촬영을 하란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에게 익숙하게 돈벌이를 나서는 어린꼬마들.. 부모들도 아예 내 놓고 야마를 몰고 나가라고 하는것 같다. 하지만 이곳의 하늘은 맑고 청명해서 순식간에 약간을 씁슬 햇던 기분을 확 날려버린다. 공중에 뜨있는 듯 오밀 조밀한 잉카의 수도 꾸스꼬는 마티즈로 못 가는 곳이 없고 이곳에서 부터 긴여행에 지치기 시작한 일행들의 신경전은 서로를 긴장 시켰다. 잉카 제국은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페루인 쿠스코이다. 이 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1438년에 본격적으로 역사시대를 맞이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95년 동안 잉카는 무력 정복과 평화 조약을 적절히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남서 중앙 볼리비아, 북서 아르헨티나, 북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 남부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방대한 남서 아메리카 대륙을 융합했다. 잉카 제국의 공식적인 언어는 퀘챠이다. 그러나 퀘챠 외에도 수백 개의 지역 방언과 사투리가 있었다. 퀘챠는 트완틴수유(Tawantinsuyu)라고도 한다 퀘챠 표기법 개정 이전에는 타완틴수요(Tahuantinsuyo)라는 스페인어로 표기했다. 트완틴(Tawantin)은 넷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tawa와 그룹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ntin, 지역 혹은 지방이라는 의미의 수유(suyu)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즉, 퀘챠는 네 개의 지역 혹은 네 개의 지방 연합이라는 의미이다. 이름 그대로 잉카 제국은 네 개 수유로 나뉘어 있으며, 수유의 네 모서리는 수도인 꾸스꼬와 접해 있다. 각 지역에 다양한 우아까(Huacas)가 있었지만, 잉카 왕은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파차마마(Pachamama)와 같은 다른 신을 믿는 종교인들에게 태양신을 믿도록 종용하였다. 잉카 제국은 그들의 왕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역사 : 잉카 제국에는 다양한 건국신화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창조의 신 티키 비라코차에겐 8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의 4명의 형제들(아야르 카치·아야르 오코·아야르 아이카·아야르 망코 )과 4명의 자매들은 다른 곳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빠까리땀보를 떠난다. 여행중 망꼬와 오꼴로 사이에 신치 로까가 태어난다. 신치 로까는 이들을 꾸스꼬로 인도한다. 그들은 꾸스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망꼬 카팍이 꾸스꼬의 지도자가 된다. 또 다른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다. 태양의 신, 인띠는 깊은 호수 띠띠까까에서 망꼬 와 마마 오꼴로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 할 것을 명한다. 지하 동굴로 꾸스꼬까지 여행한 망꼬와 오꼴로는 꾸스꼬에 그들의 첫 번째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들어와서야 기록으로 남겨졌다. 몇몇 학자들은 잉카 제국인들이 이러한 신화를 매듭문자(quipus)로 기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고학 안데스 문명은 그 어원이 안데스 산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문화군이 발전하였던 지리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다.[1] 안데스 문명은 약 BC 1000년경 현재 푸나라고 불리는 페루의 고원지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의 잉카족들은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거주지의 지리학적 위치는 잉카족들을 왜소하고, 땅달한 형태로 만들었다. 남자의 평균키는 약 1.57m였으며, 여자의 평균키는 1.45m였다. 또한, 그들의 폐활량은 다른 종족들 보다 3배이상 뛰어났다. 잉카족들은 다른 종족들보다 심장박동 속도가 느렸으며, 혈액도 2리터 이상 많았고, 핏속에서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 수치 또한 다른 종족보다 두배이상 높았다. 고고학자들은 해발 5.300m 만큼 높은 알티플라노의 온대 지역에서 안데스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잉카 족들의 신체 구조상 스페인 정복자들보다 키가 작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 엄청난 고도에서도 잘 견딜 수는 신체 조건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전 시대의 최고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의 수준일 뿐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잉카 제국이 첫 번째 문명 같지만, 잉카는 분명 다른 문명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 발전했던 다양한 문화에서 이미 잉카문화에 견줄만한 혹은 그보다 더욱 우수하였던 많은 문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잉카 황금 유물"이라고 통상적으로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잉카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안데스 학자들은 잉카제국 이전에 띠띠까까 호수 주변에서 약 500년간 종교 의식과 행정의 중심 도시으로써 매우 번영했던 띠와나꾸 문명을 발견했다. 잉카 제국의 첫 번째 통치자는 망꼬 카팍이다. 망꼬 카팍 이후 7번째 왕조까지 각각의 통치 기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망꼬 카팍의 통치 기간을 1250년 부터 1438년까지 약 188년 가량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잉카 제국은 중앙 고원인 꾸스꼬에서 기원하여, 연안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아갔다. 그들은 태양신을 섬겼다. 그들의 관료 조직은 11개의 왕족 계층에 속하는 관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들은 꼬야 혹은 여왕과의 근친혼을 통해서 권력을 세습하였다. 잉카 제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산지대의 기후 조건 때문이다. 고산 지대인 잉카 제국의 자원은 라마, 알파카, 그리고 비큐나로 제한되어 있었다. 잉카의 9번째 왕조, 파차꾸띠 잉카 유빵끼가 1445년 띠띠까까 지역을 정복했다. 파차꾸띠 잉카 유빵끼는 잉카의 문명과 정복 지역의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 시켰다. 치무 문명이 그의 좋은 예이다. 파차꾸띠는 왕실의 인재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청동 전투 도끼, 끝은 돌 이나 청동으로 장식된 나무막대, 투석기, 창, 던지는 창, 활과 화살, 가죽으로 덮어씌운 나무 방패, 면이나 등나무류로 만든 헬멧, 그리고, 누빈 갑옷으로 군대를 중무장시켰다. 잉카 공직자들은 각각의 함락된 지역에 파견되었다. 락된 지역 관리자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꾸스꼬로 데려 감으로써 각 지역 관리자들에게 충성심을 요구 할 수 있었다. 파차꾸띠는 퀘챠를 공식언어로 선포하였고, 함락된 지역의 종족들이 태양신을 섬기로 종용하였다. 생산력을 증대 시키기 위해, 그리고 관개와 계단식 농업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 함락국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농토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페루 서해안의 섬에 있는 해조의 똥이 퇴적 경화하여 생긴 천연비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잉카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태양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는 권위적이고 엄격한 정부였다. 그들은 신전과 요새, 그리고 북 키토(에콰도르)에서 중앙 칠레 딸까까지 이어지는 3,250 마일이나 되는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는 제국의 힘을 유지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지만, 후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을 쉽게 정복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잉카 제국의 통치자와 그의 수행원들을 위해서 매 4.5마일 마다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매 12마일 마다 휴게소 혹은 땀보라 불리는 객사가 있었다. 또한, 잉카 제국의 전령 챠스퀴스가 쉴 수 있도록 매 5마일 마다 작은 우체국이 있었다. 한 명의 챠스퀴스는 하루에 약 150마일을 달린 후에 교체된다. 구두전언은 결승 문자나 매듭문자로 보충되었다. 이는 고대 유럽에서 사용되어지던 탤리스틱과 비슷하다. 잉카 제국의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을 하여야만 했고, 심지어 귀족들도 솔선수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잉카 제국이 두 계층의 조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 파까떼라고 주장한다. 일반 사람들이 법을 어겼을 때 받는 형벌은 관리들의 그것보다 덜 엄격했다. 이것은 잉카 제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상위 계층의 중요성을 강조한 한 예이다. 꾸스꼬 왕조의 첫 번째 왕족은 망꼬 카팍이다. 잉카 사람들은 약 12세기 경, 꾸스꼬에 작은 도시를 세우며 잉카 문명의 싹을 피웠다. 1438년 경 사파 잉카(유일한 왕) 파차꾸띠-꾸시 유빵끼는 꾸스꼬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파차꾸떽이란 명칭은 그가 현재의 아푸리맥인 찬까스를 정복한 후에 붙여졌다. 그와 그의 아들 뚜팍 유빵끼는 안데스 산맥(대략 현재의 페루와 에콰도르)의 상당 부분을 잉카 제국의 통치하에 복속 시켰다. 잉카제국의 군주는 사파 잉카(Sapa Inca, 케추아어로 '유일한 왕'이라는 뜻)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는 보통 '황제'로 번역된다. 5대까지는 제1왕조, 6대부터가 제2왕조이다. 제국으로써 성립된 시기는 9대(제2왕조 4대) 파차 쿠티크의 때이다. 13대(제2왕조 8대) 아타 왈파의 대에서 제국은 멸망하나 이후 잔존 세력이 남아 스페인에 저항을 계속했다. (14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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