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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활동하던 석도 - 철차산 본문

▷♣[희정의트래킹야기]/장가게·원·온가게

장보고가 활동하던 석도 - 철차산

여행작가신점숙 2013. 1. 30. 19:27

 

 

지난 초봄에 중국의 몇군데의 트래킹 코스 답사를 위해 아주 저렴하면서도 편안한
휘리로 중국을 다녀 왔다.여행을 하면서 휘리로 다닌다는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시작했던

일주일간의 일정에 위해를 가면서 담은 사진들을 순서 대로 시간 될때 마다 올려 볼려고 한다.

 

 

올려진 사진들과는 설명이 일치 하지는 않지만 게속 올려 볼려한다.우리들에게는 위해로 알려진 웨이하이에 대해 알아본다(위해),

웨이하이 는 산둥 성 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산둥 성의 가장 동쪽의 항구이고 황해에 접해 있다. 인구는 249만 명, 면적은 5436km2이다.

지리 : 산둥 반도의 동쪽에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북동남은 황해에 면해 있고, 북쪽 방향은 랴오둥 반도와 가깝고,

동쪽 방향은 한반도와 가깝다.

 

 

웨이하이는 주변 바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온화한 계절풍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8월에는 가장 더운 달이며, 24.3 °C까지

기온이 올라간다. 1월은 가장 추운 계절이며, -1.5 °C까지 내려간다.

환취 구 / 원덩 시 / 룽청 시 /루산 시

 

 

역사 : 항구는 청나라 때 북양함대의 기지였다. 1895년에 일본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웨이하이 전투가 벌어졌다. 1895년에 일본군은 철수했다.석도는 조용하고 조그마한 어촌이라 중국인도 잘 모르는 곳이지만 여행자가 쉬어 가기에는 좋은 곳다. 석도에서 볼 만한 것으로는 법화원,항구, 바닷가로 시내와 주변을 걸어서 둘러보아도 반나절이면 된다. 법화원은 신라장군 장보고가 세운 사찰터에 재건되었으며 주변에는 중국진출을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석도항은 바로 장보고의 무역선이 출입하던 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인이 모여 살던 신라방 적산촌이 있었다. 석도는 예전에는 가난한 마을이였으나 지금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잘 사는 마을로 바뀌고 있다.

 

석도항 뒤로 웅장하게 솟아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바위가 붉다 하여 이름불리는 적산(372m)이며 그래서 이곳 석도항의 엣 이름도 적산포라고 했다. 적산아래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과 붉은 지붕을  한 마을이 옛날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신라방이다. 적산법화원은 일본 헤이안 시대 천태종 승려 엔닌승이 입당 구법한 내용을 일기체로 쓴 입당구법 순례행기로 비로소 알려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적산법화원에 관한 이야기는 아버드대학 아리샤워 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산동선 석도항이 시원하 내려다 뵈는 곳에 자리한 장보고 상은 명신으로서 바다의 풍랑을 잠재워 주는 신으로 이곳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무게만  300톤의 적산 명신상은 바라만 봐도 웅장하여 모든 이를 압도한다.명신상 아래엔 옥으로 새긴 장보고 활동부도가

화려하게 장식되 있는데 촬영금지다.

 

장보고는 신라시대 극심한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당나라로 밀입국하여 장교로서 입신 한 후에 대 선단을 이끌고 동북아 물류의 물꼬를 튼 해상왕으로 이름 떨친 인물로 문등헌 적산촌에 있던 장보고에 의해 세워진 적산법화원이 유명하였는데 법화원은 재력을 갖춘 사찰로 재당 신라인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법화원은 당시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이 절에서는 신라의 승려는 물론 당승 및 일본에서 건너온 승려도 있었다고 하며 500여명이 기도 하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적산법화원 장보고기념비는 중국 산동성 룽성시 스다오전의 적산법화원 터에 장보고의 업적을 기려 세운 기념비로 높이 2m, 가로 90cm 세로 130cm이며 1990년 4월 1일 건립되었다. 한국해야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의회 후원을 얻어 장보고의 엣 청해진 터인 전남 완도군민 대표들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820년 신라방 이였던 당시의 뭔덩현 저간총네 세운 그의 본원사찰로, 845년의 회창법란 때 헐려서 황폐한 것을 이 절의 도움을 받은 일본승려 엔닌을 기리는 일본측 관게자들의 협력을 받아 중국 당국이 중건하였으며 중건과 때를 맞추어 한국학계에서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방보고가 신라,당난라,일본 등 3국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과 구법을 위해 법화원에 온 일본 승려 엔닌이 신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였다.

 

러시아가 1898년 3월에 반대편 해안에 위치한 뤼순을 조차지로 삼은 후에 영국은 러시아가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웨이하이를 조차했다.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뤼순 항을 넘겨받자 영국은 일본이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조차지를 유지했다. 그래서 도시는 영국이 1898년부터 1930년 10월 1일까지 조차한 "웨이하이웨이"로 불리는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영국 해군의 여름 주둔지였다. 극동아시아의 왕립 해군은 중국 해안에 두 개의 주요 항구가 있는데 하나는 남쪽의 홍콩이고 또 하나는 북쪽의 웨이하이였다.

 

웨이하이가 조차지가 되었을 때 왕립 해군의 고위 해군 장교가 영토를 관할했다. 1899년에 관할이 군대에서 런던 전쟁 사무국이 임명한 시민 총독으로 바뀌었다. 영토 수비대는 200명의 영국군과 영국인 장교가 지휘하는 중국인 군대로 이루어져있었다. 1901년에 이곳을 요새화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관할은 영국 식민지 사무국으로 바뀌었다.

 

1902년에 영토를 운영하기 위해 시민 위원을 임명했고 1903년에 중국인 군대는 해산되었다.

웨이하이의 마지막 영국 총독은 레지날드 존스턴이었다. 이곳은 청나라 이후에 들어선 중화민국 때 반환된 후에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에 웨이하이웨이 시는 웨이하이 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제 : 현재 웨이하이는 상업항으로서 주요 어항의 중심으로써, 경업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등 약 1500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약 3만명의 한국 교민과 600여명의 유학생이 생활하고 있다.

년간 한국인 관광객 수는 약 60만명 내외 이다.

 

교육 : 산둥 대학교 캠퍼스와 하얼빈 공대 캠퍼스가 이곳 웨이하이에 각 1개씩 위치해 있다.

관광 : 웨이하이 시는 해도(海岛)의 경치, 해안의 백사장, 온천, 기이한 산과 바위, 저수지, 호수 등의 자연경관을 비롯해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도시건축, 공원, 사적(史迹), 도교사원 등의 인문경관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웨이하이 시는 중국 제일의

위생도시이기도 하다. 80년대 말, 웨이하이 시는 6개의 관광 구를 형성하였다.

 

환취러우를 중심으로 한 시내 관광 구갑오해전(청일전쟁) 기념지를 주제로 한 류궁다오관광 구
청산터우 자연경치 및 진시황 순찰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청산터우 관광 구석도, 9개 봉우리의 톄차 산을 주로 한 석도관광 구
성징 산, 즈취안펑(紫全峰), 동화궁등의 도교유적지와 타이보딩, 싼반스(三瓣石)
등의 자연경치를 주로 한 쿤위 산 관광 구다루 산(大乳山) 루산커우(乳山口), 백사장을 중심으로 한 루산커우(관광 구
청산터우는 산둥반도의 동쪽 끝에 있으며 톈진터우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 94해리 정도 떨어져 있다.

 

적산법화원: 장보고가 세운 절로 장보고 유적지이다.
위해위는 웨이하이 시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중국 근대 제 1 해군부대 북양 수군 의 창시지였다. 또한 청일전쟁 때 영국 해군의 주요 해군 기지였다. 1988년, 국무원은 웨이하이 류공다오, 청산터우를 국가 급 풍경 명승지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여수시와는 1996년 10월 18일에 자매결연을 맺었다.

 석도의 거리

 석도항의 이런 저런 모습들..

 

 

 석도항에서 인천 가는 훼리에서 아침일찍 석도항의 모습..

 

 

 

 

 

 

 

 

 

 

 

 

 

 

 

 

바쁘게 움직이는 석도항의 어선과 여객선들의 모습에서 위해의 경제가 활발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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