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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가 신점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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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소 이야기

신점숙작가 2009. 1. 5. 12:25

고(故) 만봉 스님이 그린 ‘12지 불화’ 중 소 그림.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09년은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다.

십이지의 두 번째 자리에 해당되는 소(丑)는 방향으로 북북동, 시간적으로는 오전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12월을 지키는 방향신(方向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소를 이같이 배정한 것은 소의 발톱이 갈라져서 음(陰)을 상징한다는 점과 성질이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아 씨앗이 땅 속에서 싹터 봄을 기다리는 모양과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는 우리나라 농경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뛰어넘어 마치 한 식구처럼 생각돼 왔다.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노동력일뿐 아니라 운송의 역할도 담당하였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의 역할까지 했다. 1970~80년대 대학을 상아탑에 빗대 우골탑(牛骨塔)으로 부른 것이 이를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소는 가장 친숙했던 동물이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온순하며 끈질기고 힘이 세나 사납지 않고 순종한다. 이러한 소의 속성은 한국인의 정서 속에 녹아들어 여러 가지 관념과 풍속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소의 성격은 순박하고 근면하며 우직하고 충직하다. ‘소같이 일한다’·‘소같이 벌어서’·‘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 등의 말은 소의 근면함을 들어 인간에게 성실함을 일깨워 주는 속담이다.

농경사회인 우리 민족에게 소는 예로부터 농사일을 돕는 일하는 짐승으로, 부와 재산, 힘을 상징해왔다. 제주도 삼성혈 신화나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는 소가 농사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라 토우들 가운데서도 물소를 연상시키는 소가 발견된다. 소를 생구(生口)라고 할 만큼 소중히 여겼던 우리 조상들은 소를 인격시하기도 했다.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에 길을 가다가 어떤 농부가 두 마리 소로 밭을 가는 것을 보고 “어느 소가 더 잘 가느냐?”고 물었더니 농부가 귀엣말로 대답하면서 “비록 짐승일지라도 사람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어 질투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옛 그림 속에는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많이 그렸다. 소의 성질이 급하지 않아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으며 진창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가기 때문에 예로부터 소는 왕이 타는 최고의 승용동물이기도 했다.

소가 창출해 내는 분위기는 유유자적의 여유·한가함·평화로움의 정서다. 특히 도교에서 소는 유유자적을 의미한다. 옛 그림 속에 나타나는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은 바로 도교의 영향이다. 한편 유교에서 소는 의(義)를 상징한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주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은 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 의우총(義牛塚)에 관한 전설이나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우답동 이야기는 소의 우직하고 충직하며 의로운 성품을 잘 나타낸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한다. ‘십우도(十牛圖)’나 ‘심우도(尋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현한 것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은 호가 목우자(牧牛子)였다. 소를 기르는 이, 즉 참다운 마음을 장양(長養)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꿈은 조상·산소·자식·재물·협조자·사업체·부동산을 상징한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라는 속신어나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는 풍수지리설 등을 통해 볼 때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소 주식장세’라는 말이 있다. 증권가에서 영어로 장세가 좋은 강장세(强場勢)를 ‘불 마켓(Bull Market)-황소 장세’라고 한다.

2009년 기축년은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어진 눈, 엄숙한 뿔, 슬기롭고 부지런한 힘, 유순, 성실, 근면, 인내 등 소의 덕성으로 전 세계적인 경제난을 극복하고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해보자. 주식시장도 기축년 한 해 내내 황소 장세를 이어가길 기대해보자.

소띠 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국립민속박물관이 3월2일까지 기획전시실Ⅱ에서 열고 있는 ‘소와 함께 세상이야기, 우행(牛行)’ 특별전에서 얻을 수 있다.



끈질기고 일복 터진 그대의 이름은 `소띠`

기사입력 2008-12-31 16:26
안윤모 작 "소띠",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
2009년은 기축년(己丑年), 즉 소의 해다. 소는 대개 성실과 근면, 끈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가끔 큰 덩치와 느린 움직임 때문에 아둔하고 미련하다는 소리도 듣지만, 이는 우직함과 고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띠생을 '끈기와 우직함으로 업무를 완수하는 일꾼들'이라고 믿었다. 언뜻 보기에 뚜렷한 개성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면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 소띠생들은 겉으로는 엄정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소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농사일을 위한 필수적인 노동력인 동시에, 일상생활에선 달구지를 끌어주는 운송수단이었으며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목돈을 장만할 수 있는 비상금고의 역할까지 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고 했고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고도 했다. 때문에 12간지 풀이를 보면 소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일복은 많지만 결국 집안에 부(富)를 몰고 온다'고 쓰여 있다.

소가 이런 존재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집안 전체의 화(禍)을 막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이사한 뒤에 문에 소뼈나 소 고삐를 매달아 두는 풍습은 나쁜 귀신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의미였고 소꿈은 집안의 재력이나 집안의 길흉화복과 관련돼 있었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거나 '소가 문밖으로 나가면 재물을 잃는다'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말은 이 같은 조상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이 일상생활에 소를 이용한 것은 오랜 옛날부터다. 북한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 해당하는 궁산(弓山) 유적에서 물소의 뿔이 출토됐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또 소뼈가 함경북도 무산의 구석기 유적과 회령 오동 유적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이미 이 시기에 소를 집짐승으로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가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동물이었는지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 토우에서도 그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는 달구지를 끌고 가거나 외양간에서 한가로이 여물을 먹는 모습으로 발견되는가 하면, 견우직녀 이야기를 형상화한 그림에서는 견우가 끄는 동물로 등장하며, 농사신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신라 토우에서 발견되는 소 중에는 요란하게 뿔을 지닌 사례도 발견되는데 그 모습이 물소와 비슷하다.

우리 조상들은 소에게서 한가로운 대인(大人), 은자(隱者)의 이미지를 보기도 했다. 결코 급하게 행동하거나 긴장하지 않는 소의 모습과 순박한 눈동자는 여유와 평화로운 느낌을 연상케 했다. 그런 흔적은 소를 소재로 한 시문이나 그림, 고사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당시 선비들이 남긴 시문을 보면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는 선계(仙界)에 대한 동경을 묘사할 때 소를 많이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에게 소를 탄다는 것은 세상사나 권력에 민감하게 부화뇌동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소를 잘 그린 조선시대 화가로는 김홍도, 윤두서, 이경윤 등이 있다.

십이지 중 소를 지칭하는 '축(丑)'은 달로는 음력 12월을 가리킨다.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은 소의 속성이 씨앗이 땅속에서 싹터 봄을 기다리는 모양과 닮았기 때문에 여기에 배정된 것이라고 한다. 방향으로는 북북동, 시간으로는 새벽 1~3시를 담당한다.




기축년 띠풀이..근면ㆍ우직ㆍ유유자적

기사입력 2008-12-23 07:00 |최종수정2008-12-23 10:13

내가 바로 우리나라 송아지들의 아버지 (서산=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2009년 기축년(己丑年) '소띠의 해'를 앞두고 충남 서산 한우개량사업소에서 키워지는 한우(韓牛)의 아버지 '씨수소'가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 목초지에 있는 '씨수소'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보증씨수소 48마리로부터 매주 2~3차례, 회당 2번꼴로 채취된 정액은 스트로(straw) 형태로 만들어져 전국 축산농가로 보내진 뒤 암소와의 인공수정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97%의 송아지를 생산하게 된다. << 지방 기사 참조, 한우개량사업소 제공 >> kane@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소는 다른 동물에 비해 덩치가 크고 움직임도 느린 편이다. 개나 고양이에 비해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쇠귀에 경읽기'며 '황소고집'이라는 말이 사용되는가 하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식으로, 적어도 이 땅의 소들에게는 치욕스런 속담도 생겨났다.

이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소는 우직함과 고집, 그리고 때로는 아둔함과 미련함의 상징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문화에서 차지하는 소는 근면함과 유유자적의 대명사였다. 나아가 동물 중에서는 우리와 가장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던 주역이요, 풍요와 힘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소는 부(富)를 불러오고 화(禍)를 막아주는 존재였다. 농가 밑천으로는 소가 최고의 자산이었으며 이사한 뒤나 동제를 지낸 다음에 소뼈나 소고삐를 매달아 둔 것은 나쁜 귀신의 범접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꿈 중에서도 소꿈은 조상, 산소, 자식, 재물, 협조자, 사업체, 부동산을 상징하니 '소가 문밖으로 나가면 간사한 일이 생긴다'거나 '누렁소나 암소가 들어오면 복이 들어온다', '소꿈은 조상꿈이다'는 속담이 이에 해당한다.

내년은 기축년 소띠해 (서울=연합뉴스) 내년 2009년은 기축년 소띠해. 우리와 가장 친숙한 동물인 소는 근면ㆍ우직ㆍ유유자적을 상징하며, 때로는 복을 불러오고 화를 막아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양산 통도사 소그림은 소가 지닌 화를 막아주는 기능을 잘 보여준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
소는 이런 존재이기에 소가 새끼를 낳을 때는 신이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소삼신'이 바로 그 것인데, 소가 새끼를 낳으면 왼새끼 줄에 백지를 매달아 1-3일간 대문이나 외양간 앞에 놓기도 했다. 이는 상가를 다녀온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소가 우리 민족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 동물이었는지는 일찍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 토우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는 달구지를 끌고 가거나 외양간에서 한가로이 여물을 먹는 모습으로 발견되는가 하면, 견우직녀 이야기를 형상화한 그림에서는 견우가 끄는 동물로 등장하며, 농사신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357년에 제작된 안악 3호분에서는 전실(前室) 동측실(東側室) 남쪽 벽에 외양간 그림이 있으니, 골기와를 이은 우산각집인 외양간에서 누렁소와 검정소, 그리고 얼룩소 세 마리가 통나무 구유에 담은 여물을 먹는 장면을 포착했다. 이들 쇠뿔에는 죄다 빨간 물감을 들인 대목이 흥미롭다.

신라 토우에서 발견되는 소 중에는 요란하게 뻗은 뿔을 지닌 사례가 발견되는데, 물소를 연상케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파사왕 5년(서기 84년)에 고타군수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푸른 소는 흔히 노자(老子)가 타고 다니는 동물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삼국시대에 발견되는 소의 다양한 이미지는 조선시대 선비사회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발견된다.

소는 우직하고 순박하며 여유로운 천성을 지닌 동물로 인식된 까닭에 선비들은 각별한 영물로 여기곤 했다. 그런 흔적은 소를 소재로 한 시문이나 그림, 고사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내년은 기축년 소띠해 (서울=연합뉴스) 내년 2009년은 기축년 소띠해. 우리와 가장 친숙한 동물인 소는 근면ㆍ우직ㆍ유유자적을 상징하며, 때로는 복을 불러오고 화를 막아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김홍도 그림 '목동귀가'에서 소는 탈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

특히 당시 선비들은 속세를 떠나 은일자적(隱逸自適)할 수 있는 선계(仙界)에 대한 동경을 묘사하면서 소를 그 이미지로 부각하고자 했다.

소를 잘 그린 조선시대 화가로는 김제, 이경윤, 김식, 윤두서, 조영석, 김두량, 김홍도, 최북 등이 있다.

김제의 '와우'(臥牛), 즉 드러누운 소라는 그림은 간단한 배경에 한가로이 꼬리를 늘어뜨리고 엎드린 어미 소를 포착했으며 그의 또 다른 '황우'(黃牛) 그림에서 황우는 살이 찐 뒷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경윤의 '기우취적'이란 작품은 중앙에 두 마리 어미 소가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앞선 소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마치 뒤따르는 소와 대화하는 듯한 표정이다. 뒤쪽 어미소 등에는 웃통을 벗은 더벅머리 목동이 올라 타고는 피리를 분다. 아마 속세를 초탈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김식(1579-1662)의 작품 '고목우'와 '수하모우', 그리고 조영석의 '소그림'은 젖을 먹는 송아지와 어미 소를 소재로 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에게 소를 탄다는 것은 세사(世事)나 권력에 민감하게 굴거나 졸속하지 않는다는 정신적인 의미가 있다. 나아가 권세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다는 의미도 아울러 내포했다.

2008년 무자년(戊子年)은 쥐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한때는 상아탑에 빗댄 '우골탑'이란 말이 대변하듯 우리네 전통사회에서는 어쩌면 삶 그 자체일 정도로 부피가 컸던 소에게는 가장 치욕스런 해였다. 이른바 광우병 파동에 휘말린 소가 2009년 기축년 새해에는 복을 불러오고 화를 막아주는 존재로 다시금 우뚝 서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