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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가 신점숙작가

세계7대 불가사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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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 불가사의

신점숙작가 2012. 7. 24. 22:29

 여행이시작되는곳 - 비나리투어카페[국내여행 해외여행 태항산트래킹]

 

 

세계7대불가사의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해 낸 것으로서 그들이 당시에 보고 들어서 알던 주변의발달된

문명 국가들이 이룩한 웅대한 건축 및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이 아래에 든 명단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세계의 7대 기적이란 명칭을 상대적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기원전 약 3세기를 전후로 하여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일곱 개의 이른바 "기적물"은 시대에 혹은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퀴로스의 궁전, 바빌론의 바벨탑이 경우에 따라서 7대 기적물에 손꼽히기도 한다.

원래 파로스 등대 대신 바빌론 성벽이 들어갔지만, 후에 바뀌었다.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지은 시 안에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나온다.

이 목록에 나온 것들 중 바빌론 성벽(이슈타르의 문)은 6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로 교체되었다.

1.대피라미드 (→ 이집트 문명)
2.바빌론의 공중 정원 (→ 바빌론)
3.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등대) 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4.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에페소스)
5.마우솔로스의 영묘 (→ 할리카르나소스)
6.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올림피아, → 제우스)
7.로도스의 거상 (→ 로도스)


 

 

 

기자의 대피라미드 - 이집트 문명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 중 하나이다.

기원전 2560년 무렵 세워진 쿠푸의 피라미드로 완공에는 약 20년이 걸렸다 피라미드 중 가장 큰

피라미드이기에 대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바로 옆에 아들 및 손자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파라오 3대의 피라미드가 있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가 기자의 피라미드 군 앞에 있다.

대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역사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560년경 14년에서 20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쿠푸의 와지르였던 헤미우누가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11년 잉글랜드에 링컨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약 3,800년간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피라미드 안의 구조

 


높이는 약 147미터이며, 밑변의 길이는 약 230미터이다. 고대 이집트의 단위로는 높이 280 큐빗,

한변의 길이 440 큐빗이 된다. 고대 이집트의 1 큐빗은 0.542m에 해당한다.

원래 꼭대기에는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는데 도난당해 지금은 마치 윗면이 작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다.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들어간 돌의 전체 무게는 약 5900만 톤으로 추정되며,

약 230만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돌은 2톤 정도이지만

큰 돌은 한개의 무게가 무려 50톤에 달한다.

그리고 평균 돌의 무게는 2.5톤이다.

 

왕의 방
왕의 방은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건물의 중간에 있는 텅 빈 공간이다.따라서 방 주위가 아무리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석회암 1㎥의 무게는 2.6톤으로 왕의 방의 지붕은 1㎡ 당 무려 254.8톤의 무게를 받는다.

그래서 피라미드 설계자들은 조금이나마 돌들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돌

위에 돌을 쌓아 무게를 분산시켰다.

 

이름은 비록 왕의 방이지만, 현재 용도를 알 수 없는 방이다. 왜냐하면 왕의 방에 들어가면 중간에 있는 관 빼고는

특별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이 방이 왕의 방이 아니라 단순한 도굴꾼

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알 마아문이 들

어갔을 때도 보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왕비의 방

왕비의 방은 역시 돌로 만들어졌으며, 아직 용도를 알 수 없는 방이다.

동서로 5.7미터이고, 남북으로 5.2미터이며 높이는 6.2미터

이다.현재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빈 무덤 설
압바스 왕조의 7대 칼리프 알 마아문(재위 813~833년) 칼리프가 구멍을 뚫고 832년 쿠푸의 무덤 방에 들어갔다.

알 마아문은 쿠푸의 무덤 속에서 쿠푸의 유골은 물론, 그가 기대했던 어떤 보물도 갖고 가지못한 것으로 얘기된다.

물론 아직도 알 마아문 칼리프가 대피라미드를 완벽히 털어 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하지만 빈 무덤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대피라미드 안에는

보물은 물론, 찢어진 천 조각이나 부서진 도자기 등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 공간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쿠푸의 대피라미드 안에 비밀 공간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도 일리가 있는데, 대피라미드 내부에는 왕의 방이 무려 37,000개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있다.

또 피라미드 내부에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밀 중력계나 전자파 레이더를 이용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대피라미드의 비밀 공간은 모두 세 곳이다.

왕의 방 밑에 있는 공간왕비의 방으로 가는 수평 통로 아래에 직선으로 뻗어 있는 공간
왕비의 방 남쪽 벽에 있는 환기 통로 중간의 공간:최근에 소형 로봇을 이용해서 탐사한 결과, 통로 중간에서 금속 덩어리가

달린 칸막이가 발견되었는데, 드릴을 이용해서 구멍을 뚫고 내부를 살펴본 결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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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공중 정원-바빌론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세미라미스의 가공정원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비잔티온의 휘론이 선택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조물의 하나인 옥상정원이다. 이름으로 보면 중력에 역행해서 공중에 떠있는 정원

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높은 단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개설
현재의 바그다드 교외에 약간의 유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600년경에 신바빌론 왕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

출신의 왕비 아뮈티스를 위로하기 위해(식물이 있는 메디아에서 자란 아뮈티스 왕비는 건조한

사막의 나라인 바빌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바빌론에 건조한 정원이다.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궁전 안에 만든 높이 25미터, 1단이 넓은 장으로 5단

계단으로 되어 있는 테라스에 흙을 묻고, 물을 위에까지 끌어 올려 밑으로 흘리고, 수목과 꽃등을 심었다.

매우 큰 정원이어서 멀리서 보면 흡사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장 위의 면적은 60평방미터로 추정한다.

고대 로마의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니네부에에 있었다고 하는 다른 정원과 혼동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스토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기둥과 지

하실은 연기와로 만들어져 있고, 네 모퉁이를 기둥으로 받혀져 있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입방체의 테라스에 흙을 묻고 정원을 구성해서, 그

위에 아치지붕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매달려 있는 정원」이라는 오역이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어에서 kremastos또는

라틴어의 pensilis를 부정확하게 옮긴 탓으로 보인다. 물을 위에까지 끌어올린 방법에 대

해서는 끝없이 물을 공급하는 기계,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 펌프 등의

설명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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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또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그리스어: o Φάρος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을 말하며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

만 지금은 파괴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
파로스 섬은 알렉산드리아에 면한 작은 섬으로 헵타스타디온이라 불리는 인공적인 1km의 제방으로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집트 해안선은 매우 단조로와서 항구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데 아마도

이 파로스의 등대는 항해의 편의를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 횃불과 거울을 설치하여 밤에 불을 밝힌 것은

 1세기 경 로마 시기부터였으며, 그 이전의 시기에는 주간에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간 항

로표지로서 기능하였다. 

 

건설과 붕괴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자 헬레니즘-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을 소테르(구원자 라는 뜻)로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항구 부근의

파로스 섬에 등대를 건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등대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2세 대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정확한 완공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등대는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높이가 약 130 미터에 달했으며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 아랫부분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채, 중간 부분은 팔각형 맨 윗부부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맨 윗부분에서 빛이 나와 불을 밝혔다고 하며, 맨 꼭대기에는 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불빛이 나오는 부분에는 거다란 거울같은 반사경이 있어 밤에 빛을 반사했으며 건물자체는 워낙에 커서

군대의 막사 역할도 했다. 이 등대의 불빛은 머나 먼 43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밝았다고 한다.

 

등대 건물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져서 1183년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주바일의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1303년과 1323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480년 이집트의 술탄 카이트베이가 그 잔해로 카이트베이

요새를 만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등대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바다 속의 잔해물들도 발견되었다.

파로스는 여러 언어에서 "등대"를 뜻하는 낱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어(φάρος), 불가리아어(фар)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의 phare, 이탈리아어의 faro, 포르투갈어의 farol, 에스파냐어의 faro, 루마니아

어와 카탈루냐어의 far과 같이 로망스어군의 많은 언어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영향
파로스 등대의 건축 형태는 후대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파로스 등대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아부키르의 무덤과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에스파냐)에 세워진 헤라클레스의 탑은 명백히 파로스 등대의 모습을 본 뜬

것이다. 정방형의 하단과 팔각형의 중단, 그리고 둥근 모양의 상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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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어: Ἀρτεμίσιον, 아르테미시온), 또는 디아나 신전은 기원전 550년 경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의 에페소스에

있던 신전으로 그리스 신화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

있다. 신전이 세워졌던 흔적은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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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로스의 영묘 - 할리카리나소스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현재는 터키의 남서쪽 해안 도시 보드룸)에 있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마우솔

로스의 영묘에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사트라프(군사, 내정 양권을 장악한 태수)였던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 아르테미시아가

안치되었었는데 그 당시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뺀다면 무덤건축물중엔 최고규모였다.

 마우솔레움이라고도 하는데, 마우솔레움은 거대한 무덤건축물의 명사가 되었다.

 

건설 배경
마우솔로스는 공식적으론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령 카리아의 사트라프였지만, 사실상 군사와 내정권을 모두 장악해서 그 지방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마우솔로스는 헬레니즘 군주였어서, 할리카르나소스로 천도한뒤 헬레니즘식의 건축물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가 죽기전

영묘를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완공되기전 죽고, 그의 왕비이자 여동생이였던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영묘는 그녀가 죽은 뒤인 BC 350년 후반쯤에 완공된것으로 추정된다.

 

파괴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것으로 보이며 파괴된 후 그래도 형태는 남아있었는데 십자군 원정때 보드룸 요새로 쓰이

기 위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렇게 1900년간 원형이 보존되었던 영묘는 완전히 사라지게된다.

일부 파편들은 남겨져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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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올림피아 - 제우스

 

모조제우스상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은, 기원전 435년에 고대의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

아스에 의해 만들어진 하늘의 신 제우스를 본뜬 것이다. 고전 고대에

있어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불확실함)

 

구조
기원전 5세기경 올림피아에 제우스 신전이 만들어졌다. 제우스상은 이 신전의 안에 있었으며 그 폭은 신전 통로의 폭과 거의 같았다. 좌상이

었으며 전장은 약 12m(약 40ft)였다. 기원전 1세기 경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만약 제우스 상이 서있었다면

지붕을 뚫어버렸을 것이다."라고 써놓았다.

본체는 삼나무로 만들어졌고 표면을 상아로 덮었다. 표면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항상 올리브유를 칠했다.

좌상은 금, 상아, 흑단,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조각상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지팡이를 든 손에 독수리가 있었다.

 

그 후
기원전 2세기 경 로마의 장군인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마케도니아를 정복 했을 때 이 상을

구경하면서 신들에게 강한 경외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만들고나서 800년 후인 394년에 제우스 상은 올림피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그 후의 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에 제우스상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여겨지는 작업장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에 의해서 제우스상의 모든 모습에 대한 것이 진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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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의 거상 - 로도스

로도스의 거상 혹은 크로이소스의 거상은 로도스에 있던 조각상이다.

 

역사
기원전 407년경 로도스섬은 도시국가연합(Rhodo-Egyptian)의 수도로 건설되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그들의 주요한 동맹국(Ialysos, Kamiros, Lindos)과 함께 지중해 유수의 무역중심지였다.

기원전 305년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동맹을 깰 방법으로 도시를 관통할 수 없게 로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연합은 마케도니아를 무찔렀고,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비를 팔아 모은 돈으로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을 세웠다.

이 거상은 후일 로도스의 거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거상의 건설은 린두스 시(市)의 찰스가 12년에 걸려 기원전 282년에 끝

마쳤다. 이 거상은 기원전 225년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거의 한

천년간동안, 상이 파괴된 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서기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부서진 대거상의

나머지를 분해하였으며, 그것들을 시리아의 한 부유한 유대인에게 판매

함으로써 거상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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