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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제도 - 남아메리카 동태평양 에콰도르령 (세계50대 절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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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제도 - 남아메리카 동태평양 에콰도르령 (세계50대 절경)

여행작가신점숙 2012. 11. 23. 16:28

 

 

 

 

  갈라파고스제도[Galapagos Islands]
남아메리카 동태평양에 있는 에콰도르령(領) 제도로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떨어져 있으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준 섬으로 유명하다.

주위 해면은 해류 관계로 심해의 한랭한 물이 상승함으로써 수온은 15℃ 정도로 낮고, 바로 적도에 위치하면서도 산호초가 없다.

해수 온도가 낮아 기온도 25℃ 이하이고, 강수량도 100∼1,000mm 정도에 불과하여 야자수가 자라지 않는다.

또한 화산암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수(陸水), 곧 민물이 충분하지 못하다.

 

 

생물은 고유종(固有種)이 많으며, 1835년 영국의 생물학자인 C.다윈이 비글호(號)로 이 제도를 탐험한 이래,

그 독특한 생물상이 널리 알려졌다. 체중 200kg에 달하는 코끼리거북, 몸길이 1.5m에 달하는 바다이구아나(바다도마뱀)·

뭍이구아나(뭍도마뱀) 등의 파충류,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작은 갈라파고스펭귄, 다윈핀치 등의 조류, 목본성(木本性) 국화과 식물

스칼레시아류(類), 기타 고유 동식물 등이 풍부하다. 전체 종류에 대한 고유 종류의 비율, 즉 고유종률(固有種率)은

포유류·조류·파충류는 80% 이상, 고등식물은 40% 전후의 높은 비율을 나타낸다. 이런 생물들이 다윈에게 진화론의

착상 동기를 주었다고 하며, 오늘날 이곳을 ‘생물진화의 야외실험장’이라고도 부른다.

 

 

20세기 초까지는 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았기 때문에 코끼리거북은 멸절상태에 이르렀으나, 1934년 이후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고유생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1964년 산타크루즈섬에 다윈 연구소가 개설되었다. 이 제도는 발견된 이래 에스파냐 식민지로서

소수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832년 에콰도르의 J.비야밀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개척을 시작, 에콰도르의 영유(領有)를 선언하였다. 그 이후 인구가 증가하여

커피·사탕수수·옥수수·감자 등을 재배하며, 소·돼지·닭 등의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파나마 운하 개통 이후,

군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항공기지였다.

 

 산크리스토발섬[San Cristobal I]
면적 약 500km2. 인구 약 3천(1990). 최고점 758m. 영어로는 채텀섬(Chatham I.)이라고 한다. 에콰도르 서쪽 약 970km 지점

 태평양상에 있다. 사탕수수와 커피가 재배되고, 소 사육, 어업, 제당업(製糖業)이 행해진다. 섬의 남서단에 있는 푸에르토바케리소는

군도 제1의 항구이며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다윈연구소가 있으며 동식물 연구와 보호가 실시되고 있다.

 

 

 

이사벨라섬[Isabela I]
길이 20km. 최고점은 1,432m. 태평양 적도부근에 있는 L자형 화산섬으로 알베마를섬이라고도 한다. 많은 화구(1,000여 개)와 5개의

중심 화산이 있으며, 하나는 1925년에 폭발했다. 1535년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나, 1832년 이후에 에콰도르령(領)이

되어 유형지로 이용되었다.

섬의 남해안에는 몇 개의 취락이 있고, 서해안에는 양항(良港) 타구스코브가 있다. 최근에는 어업기지로서의 가치가 증대되었다.

거대한 황소거북이나 바다도마뱀의 서식지로서 생물지리학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남해안의 비라밀에는 항구와 형무소가 있다.

 

 

에콰도르[Ecuador]
정식명칭은 에콰도르공화국(Republica del Ecuador)이다. 북쪽으로 콜롬비아, 남쪽과 동쪽으로 페루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한다. 본토에서 965km 떨어진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가 국토에 포함한다. "에콰도르"는 "적도"를 의미하는

에스파냐어(語)로, 실제로 적도가 국토의 북부를 지나간다. "남아메리카의 티베트"라고 불릴 정도로 국토개발이 뒤진 편이지만,

수도인 키토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유산으로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은 22개주(provincia)로 되어 있다.

 

 1. 자연  

챔피온섬의 바위해변
 
에콰도르는 안데스산맥이 동부산계와 서부산계로 갈라져 국토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다. 따라서 지형은 서부의 해안지대,

중앙산지 및 그 사이의 고원분지군과 동부의 아마존강 상류 저지대로 나누어진다. 기후는 안데스산맥과 중앙아메리카난류,

훔볼트(페루)한류의 영향을 받아 지역적 변화가 심하다. 중심지는 쿠엥카, 알라우시, 암바토, 이바라 등의 고원분지에 있으며

해발고도는 2,000∼3,000m로서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기후는 저온과우(低溫寡雨)인데다 기온의 연교차도 작기 때문에 인간 거주의 최적지가 되어 수도 키토(해발고도 2,850m)를 비롯한

 대도시가 고원분지에 모여 있다. 에콰도르는 지진의 나라로 알려져 있어 에콰도르안데스는 전체 안데스 산맥 중에서 화산이 가장 많은데,

동부산계에 있는 세계 최고의 활화산 코토팍시산(5,897m)과 카얌베산(5,790m), 서부산계에 있는

에콰도르 최고봉 침보라소산(6,267m) 등 5,000m급의 화산이 8개나 있다.

설선은 5,000m이며 6,000m 이상은 곡빙하(谷氷河)를 이룬다. 이 중앙산지에서 발원하는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최대의 항행가능

하천인 과야스강(江)은 해안지대 남부에 과야스 저지라고 하는 기름진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저지부터 해안선까지는

해발고도 200∼300m의 제3기 구릉지대이다. 해안지대의 북부는 무덥고 많은 비가 내려 열대우림이 발달해 있으나,

남쪽으로 갈수록 우량이 줄어들어 사바나에서 사막으로 바뀐다.

아마존 상류의 저지대(오리엔테 지방)에는 나포강(江)을 비롯하여 고원분지에서 발원하는 긴 강이 많아 동쪽으로 흐른 다음

안데스강과 합류한다. 이 지대는 고온다습하여 연강수량이 2,000∼3,000mm나 되며, 대부분이 밀림에 뒤덮여 있고 인구도 희박하다.

태평양에 있는 갈라파고스제도(국방부에서 관할)는 해류관계로 동식물의 보고(寶庫)가 되어 있으며, C.R.다윈의 진화론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하였다. 전국토 중 경지가 11%, 초원 18%이며 숲과 산림지대가 56%나 차지한다. 

 

 
2. 주민  

키토 거리의 아이들
 
에콰도르 원주민인 인디오가 전인구의 35%, 메스티소(인디오와 백인의 혼혈)가 45%, 유럽계 백인이 10%, 흑인과 물라토(흑인과

백인의 혼혈)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백인은 여러 고원도시에 살면서 대지주나 상공업 경영자 등의 상류계급을 이루고 있고,

 메스티소는 도시중간층을, 흑인은 주로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인디오는 주로 반(半)봉건적 대토지에서

농노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급자족 경제나 방랑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語)이지만, 인디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케추아족(族)은 케추아어를 사용하고, 히바로족은 히바로어를 사용한다. 메스티소와 도시 근교에 사는 인디오의

생활양식에는 구미풍(風)이 엿보이지만, 대부분의 인디오는 그들만의 풍습을 지키고 있다. 챙이 넓은 모자와 폰초(망토 비슷한 것)

차림으로 다니며 거의가 맨발이다. 종교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교를 믿는다.

 

 

3. 역사  


에콰도르에는 옛날에는 8개의 인디오 국가가 분립해 있었는데, 15세기 전반에 키토 왕국의 지배가 확립되었으며, 이 나라는 1460년

잉카제국에 정복당할 때까지 존립하였다. 그러나 잉카제국도 1532년에 에스파냐의 정복자 F.피사로의 손에 멸망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정식으로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페루 부왕령(副王領)에 속해 있었으나 1717년부터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풍습의 차이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563년부터 독자적인 아우디엔시아(상위의 사법, 입법, 행정기관)를 형성하였으며, 이 관할구가

오늘날 영토의 기반이 되었다. 독립운동은 1809년 및 1810년의 반란에서 비롯되었는데,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S.볼리바르의 부하인 장군 수크레가 산마르틴의 원조로 키토 해방에 성공한 것은 1822년의 일이었다.

 

 

그후 에콰도르는 그란(大)콜롬비아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으나, 1830년 분리 독립하여 J.J.플로레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 상공업 경영자 중심의 과야킬과 반봉건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키토와의 지역적 대립, 이를 기반으로 한 자유당과

보수당의 분쟁 및 내란, 페루 및 콜롬비아와의 국경분쟁 등이 국가발전을 저해해왔다. 그런 속에서도 약간의 발전을 본 것은 독립

직후의 플로레스, 19세기 후반의 가르시아 모레노, 20세기 초의 알파로에 의한 3대 독재시대였다.

정치정세의 안정과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시작된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1944년 5월 공산당, 사회당, 사회주의혁명전위당(前衛黨)

등으로 구성된 민주연맹이 반란을 일으켜 아로요 델 리오의 독재정권을 타도하였으며, 그해 7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연맹이

지지하는 벨라스코 이바라가 당선되었다. 그는 1960년 선거에서도 토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내걸어 당선되었으나, 취임 후 독재적

 경향이 심해지고 증세(增稅), 평가절하, 반정부운동 탄압 등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1961년 11월 일어난 학생, 군부의 반란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부통령에서 승격한 대통령 훌리오 아로세메나는 누진소득세, 농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실행하였으며,

 1962년 1월의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 외상회의 때는 쿠바 제재 결의에서 기권하였다.

 

 

그후 국내 우익세력과 미국의 압력으로 1962년 3월 대(對)쿠바 단교(斷交)조치를 취하게 되자 쿠바지원운동, 반정부운동, 농민들의

토지점거운동이 격화되었다. 1963년 7월, 용공적 경향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정지, 의회해산, 공산당의 비합법화를

단행하였으며, 대령 라몬 카스트로 히혼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군사정권은 경제, 사회 발전

10개년 계획 등의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하여 추진하였으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정치가와 학생의 저항에 경제정세마저 악화되었기

 때문에 민정이양을 결의하고, 1966년 3월 정부를 상원의원 이에로비 인다브로에게 이양하였다.

 

 

입헌제의 조기 복귀를 지향한 임시정부는 그해 10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시행하였고, 여당인 사회그리스도교운동당의 아로세메스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치상황의 불안과 경제 위기는 가시지 않았으며, 1968년 7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벨라스코

이바라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산지의 인디오 농민이 벌이는 토지요구운동과 학생·노동자의 반정부운동 속에서 벨라스코 정권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에 대항하였으며, 에콰도르를 ‘협동조합’ 국가로 재편성하는 구상을 발표하고는 의회해산과 헌법정지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좌파의 반발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1971년에는 1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1972년 2월 군부는 마침내 대통령 벨라스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무혈 쿠데타를 통해 그를 아르헨티나로 추방하였으며, 통합참모장

로드리게스 라라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6년 1월 그 역시 퇴진하고, 육·해·공 3군 최고사령관으로 구성된 집정평의회가

성립되어 해군중장 포베이다가 집권, 민정 이양 준비를 시행했다. 1978년 1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회의 단원제,

문맹자에 대한 선거권 부여, 대통령 재선 금지 등을 규정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그후 1979년 4월의 총선거에서 인민무력연맹(PCPF)의 롤도스 아길레라가 대통령에 당선, 민정복귀가 실현되었다. 1981년 5월 대통령

롤도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부통령 우르타도가 의회의 인준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1984년 1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기독교사회당의 코르데르가 승리하였고, 1988년 선거에서는 보르하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8월에 취임하였으며,

1992년 7월의 총선에서는 공화연맹당(POUR)의 바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 정치  

에콰도르는 대통령중심제 국가로,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국회는 단원제로 123석인데 지역구 103석은 인구비례에 따라 각지역별로

직접선거, 전국구 20석은 전국구로 각 정당별로 투표하여 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한다. 임기는 모두 4년이다. 사법권은

대법원과 고등법원 및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설치되는 하급법원이 가진다. 지방행정을 맡는 주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외교정책은 상호방위원조협정 등을 통하여 대미(對美)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

LAFTA(Latin American Free Trade Association:라틴아메리카자유무역연합), 안데스지역통합협정 등에 가입하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이웃나라인 콜롬비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페루와의 국경 충돌이 잦았으나 1981년에

국교는 회복되었고‘리우 의정서’ 보장국(미국,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의 중재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1998년 10월

26일에는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하였고 2001년 10월 페루 대통령 에쿠아돌이 에콰도르를 방문하면서 양국의 협력방안을 합의하였다. 

1973년에는 산유국으로서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석유수출국기구)에 가입하였으며,

 1992년 11월 탈퇴하였다. 단교상태에 있던 쿠바와는 1981년 복교(復交)하였다. 또 1972년에는 타이완 정부와 단교하고

중국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가입을 지지하였다. 정당으로 민중민주당(DP), 기독사회당(PSC), 롤도스당(PRE),

민주좌익당(ED) 등이다. 군대는 대통령이 통수하며, 병역은 2년으로 선발 징병제이다.

 

 
5. 경제  

커피콩
 
에콰도르는 1960년대까지는 바나나, 커피, 카카오의 3대 생산물이 수출총액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농업의존형이었는데,

1972년부터 석유의 생산, 수출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경제구조가 변하고 있다. 농업은 노동인구의 30%, 수출총액의 30%를 차지하여

여전히 중요부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대(對)GNP(국민총생산) 비율은 저하하는 경향에 있어, 1975년 21%, 1999년에는 14%이다.

농업지대는 고원분지에 있는 영세경영, 저생산성의 곡물지대와, 해안부에 있는 대규모 경영의 열대성 및 온대성 농산물지대로 대별된다.

 온대성 농산물 지대의 경우는 기름진 땅과 변화가 많은 기후를 이용한 바나나, 커피, 카카오, 목화 등 수출용 농산물의 재배가 활발하다.

경지면적 432만ha의 태반은 목초지이지만 바나나, 커피, 카카오, 옥수수가 각각 20만ha 이상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쌀이 10만ha, 목화가 4만 5000ha이다.

중앙고지의 목초지에서는 대규모 경영의 목우(牧牛)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나나 왕국’으로서 세계 총수출액의 1/4을 차지한 바나나는

해외수요의 정체로 생산이 답보상태에 있고, 목화와 콩의 생산은 급증하고 있다. 또한 커피와 카카오는 국제시장성이 높다.

임산자원은 아마존 저지와 해안부에 많고, 발사재(材)와 아이보리넛(상아야자의 열매)이 특산물로서 유명하지만,

수송상의 어려움 때문에 미개발 지역이 많다.

 

 

광산자원은 풍부하지만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석유는 동부지방을 중심으로 1971년부터 급속히 개발되었으며, 산출된 석유는

1972년에 완성된 안데스를 넘는 송유관을 통해 라고아그리오 유전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의 발라오까지 약 50km의 거리를 수송한다.

2001년 현재 하루 산유량은 41만 배럴, 하루 수출량은 25만 5000배럴이며 석유가 총수출액의 약 38%를 차지하는 과도한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광물자원 개발 등에 부심하고 있으며, 외국인의 투자 유치에도 노력하고 있다.

공업부문의 구성은 여전히 식품, 섬유, 시멘트 등 기초적 소비재의 비중이 크지만, 앞으로는 기계, 전기 제품 등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1999년 시장개방화 정책으로 수출업 절차의 간소화, 비관세 장벽 철폐, 수입관세 인하 등을 추진하였고 원유 이외의

수출 품목의 다양화와 농수산물 등 전통 수출품의 생산에 증진하였다. 2001년 수출은 45억 1900만 달러, 수입은 52억 97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석유, 커피, 바나나, 카카오, 수입품목은 기계, 기기류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 페루, 파나마, 콜롬비아,

러시아, 이탈리아, 베네수엘라, 독일, 일본, 칠레, 한국 등이다.

에콰도르는 무역·재정적자 심화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에다 개혁정책의 지연, 정치적 불안정으로 경제상황이 악화한 가운데

1999년 초 브라질 금융위기 여파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0월에 외채이자 지불유예 발표로 경제파탄위기에 이르렀으나

2000년 1월 달러화(貨) 도입을 골자로 한 경제·사회 안정조치 발표를 시작으로 경제개혁을 시도하였다. 2001년에는 경제성장률이

 중남미국가 중 최고인 5.4%를 달성하는 등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6. 사회  

에콰도르의 사회는 오랫동안 백인들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왔으며 원주민 인디오와 흑인들은 하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최근 경제개발의 진전에 따라 도시 인구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고 공업화에 의한 각 인종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종래의 고정적인 사회경제계층 구분은 점차 타파되어가고 있다. 생활양식은 일반적으로 에스파냐의 경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지방에는 인디오의 전통 풍속의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다.

에콰도르는 페루와의 국경분쟁, 아마존강 유역 국경분쟁, 1995년의 국경분쟁 등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1998년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 4개 보장국 대표와 함께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60년간에 걸친 국경분쟁을 종식하였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6년), 중등학교(6년), 대학교(4~6년)로 이루어지며 문맹률은 15%(2001)이다. 언론은 《El Universo》,

《El Comercio》, 《Hoy》, 《El Telegrafo》,《Ultimas Noticias》, 《La Razon》

등의 주요일간지가 있고 방송은 라디오 448국, TV는 15국이 있다.

 

 

7. 문화  

에콰도르 나포 문명
 
에콰도르의 문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영향과 토착 원주민 문화가 혼합된 형태이다.

AD 1460년경 남쪽으로부터 잉카제국이 침입하여 에콰도르를 점령한 후 잉카의 왕 후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은 잉카의

언어를 주입하였으며 이는 아직도 에콰도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안데스의 고지대인 케추아, 오트발레노스, 살라사카스,

사라구로스 등에서는 이직도 고대 잉카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해안지역 주민은 아프리카계 에콰도르인으로 마림바 음악과 춤,

축제 등으로 유명하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는 도기, 회화, 조각, 금은 세공품 제작에 능했다.

현대 산업화의 압력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에는 샤머니즘적 전통이 존재한다. 도시들은

그 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오타볼로는 따뜻하고 진취적인 원주민들로 유명하며 쿠엥카는 빛나는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가진 유래 깊은 도시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는 전국민이 즐기는 스포츠이며,

스페인인이 도입한 투우도 인기 있다.

 

  

8. 대한관계  

에콰도르는 한국 단독수교국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1949년 10월 4일 한국을 승인하였으며, 1962년 10월 5일에는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1974년 3월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1983년 경제기술협력, 사증면제협정, 1984년 어업협정, 1985년 문화협정,

2001년 외교부간 태평양연안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상호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에콰도르에

진출하여 1977년에는 정유공장의 배관공사와 키토시의 도로포장공사에 참가하였다. 또한 원양어선이 에콰도르에

어로기술을 제공하는 등 합작투자 형식의 어로협력이 이루어져 왔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가전제품, 의류, 자동차 부품, 타이어 등이고 수출품은 원유, 바나나, 어류, 목제품 등이다.

 

 

키토[Quito]
에콰도르 북부 해발고도 2,850m에 위치하며 적도직하(赤道直下)이면서도 상춘(常春)의 쾌적한 환경에 놓여 있다.

잉카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오랜 도시로 1534년에 에스파냐의 식민도시가 되었다.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서 수많은 옛 교회 등 특이한 종교예술을 간직하고 있고 식민지 시대의 옛 모습도 많이 남아 있다.

서반구(西半球)에서 가톨릭교 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한 키토에는 1787년에 창설된 대학과 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

모직물·피혁 등의 공업도 이루어지나 경제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의 주요기능은 정부 각 기관의 존재로 상징되는 정치기능이며,

 금융면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태평양 연안의 외항(外港) 과야킬과는 국토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철도 및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시가지의 건물 대부분은 에스파냐풍(風)의 낮고 붉은 기와집이고, 도처에 아름다운 광장이 있다. 교외에는 인디오도 많이 살고 있으며

인디오 문화의 유적도 흔하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라틴아메리카에너지기구[Organizacion Latinoamericano de Energia]
1970년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1973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제3회 라틴아메리카 석유장관회의에서 정식으로 그 설립이 결정되었다.

가맹국은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海) 제국의 24개국이며 비산유국(非産油國)인 쿠바도 가입되어 있다.

이 기구는 에너지시장의 통합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개발계획에 대한 자금공여(資金供與)의 조직확립과 역외(域外)로부터의 제재(制裁) ·

억압 행위에 대한 지원 등을 당면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금이나 기술의 부족으로 국제석유자본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고결정기관으로 각료회의를 두고 있으며 1년에 2회 회의를 연다. 본부는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있다.

 석유파동[oil shock,石油波動]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原油)의 가격인상과 원유생산의 제한으로 인하여 세계 각국에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1973년 아랍의 이슬람문명권의 여러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아랍지역의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하여 서방국가, 특히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압박하면서 석유파동이 전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석유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문에 석유자원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1976 이란의 석유생산 축소와 수출 중단으로 세계는 또한 차례 석유파동을 직면하게 되었고

세계경제는 석유 가격에 따라 위기와 호황을 판가름하게 되었다.

 

 1. 제1차  


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하여 세계의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OPEC는 석유이권(石油利權) 수입의 인상을 추진해 오던 중,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灣)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원유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서방세계에서는 "에너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다시

19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인상하였다. 석유에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경제는 석유부족으로 인한 제품생산의 부족과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만연시켰다.

이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진국 및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왔다. 외교면에서는 서방세계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친(親)이스라엘에서 친아랍 중동정책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한편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제2차  


제l차 석유파동의 결과 OPEC는 "석유메이저"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의

하락을 고려한 실질 원유가격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 12월 OPEC 회의는

1976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의 인상을 결정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2월 말 이란은 국내의 정치 및 경제적인 혼란을 이유로 인하여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시키고 수출을 중단하였다.

 이 결과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어섰던 원유가격은 불과 6년 사이 20달러선을 돌파하였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석유파동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의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물가면에서는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하였으며,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또 석유수입국의 경상수지는 원유수입의 부담 증가로 크게 악화되었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상수지는

1978년의 116억 달러 흑자에서 1979년 322억 달러의 적자로 반전되었고, 비산유개발도상국은 적자의

폭이 444억 달러에서 505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반면 OPEC 산유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1978년의 240억 달러에서 1979년에는 770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한국의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1974년과 1975년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8.0%와 7.1%),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1979년과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6.4%와 -5.7%).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의 체질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에 기인한다.

 


아랍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약칭은 OAPEC이다. 1968년 1월 9일 설립하였으며, 주요기관으로 매년 4차례 여는 총회와 이사회, 사무국을 두고 있다.

의장직은 임기가 1년이며 각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당초 설립목적은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와

같은 성격의 기구로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와 그밖의 경제 분야에서 모든 종류의 합병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세계 주요 석유수출국들은 원유의 공시가격 유지·회복을 목적으로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를 결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OAPEC는 석유뿐 아니라 공통의 경제적 기반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 때 아랍 산유국들이 취한 석유금수조치가 실패한 것이 OAPEC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6일전쟁 때 미국·영국·독일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에 반발해 이들 나라에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강경조치를 취하였으나 이란·베네수엘라 등 비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증산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정책 및 그와 관련한 경제 분야에서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OAPEC을 결성하여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자원의 자주관리를 다짐하였다. 1970년 이후 공동사업을 추진하여 바레인에 25만t급 탱커 수리용 독을 만들었고, 석유화학 합병사업,

파이프라인의 공동 소유 등의 사업을 완수하였다. 국가간에 긴밀하게 연대하고, 석유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며,

회원국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2000년 현재 가맹국은 리비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이라크, 이집트, 카타르, 쿠웨이트,

튀니지의 11개국이다. 본부는 쿠웨이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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