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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청천(송나라) - 중국 개봉 본문

▷♣[희정의여행이야기]/중국여행 이야기

포청천(송나라) - 중국 개봉

신점숙작가 2012. 8. 21. 21:43

 

 

송나라
송(宋, 960년~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북송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 최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중국의 분열상태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동생 조광의(태종 조광의)가 뒤를 이어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의 통일을 이루고, 과거제도의 충실을 기도했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시대에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자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전연의 맹약(澶淵之盟)또한 요나라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경력의 화약(慶暦和約).

그 결과 획득한 평화를 토대로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구법파(舊法派)의 대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고(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송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현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남송
조구는 1127년 임안(현재 항저우)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는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侂冑)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 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の党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偽學の禁)).

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洛陽)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襄陽)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사회
당나라가 각지에 군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도사의 할거를 허락하여 이윽고

오대십국시대의 전란으로까지 이르는 것을 교훈삼아, 송나라는 과거(科挙)를

본격적으로 운영하여 명실공히 문신 관료제, 문치주의가 완성되게 되었다.

황제가 사대부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맡기는 체제는 황제전제, 군주독제라고도 칭한다.

수나라의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제도였으나,

과거가 실제적인 의미로써 효력을 발휘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대 어느 시대보다도 매우 왕성하게 과거제도가 이루어진 시기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하였고, 1번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모병제)였다.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를 고쳐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장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 명에 달했으나,

숫자만 많을 뿐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다.

사료에서도 중국 통일후의 송나라군의 전력(戰歷)은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또한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요나라 및

서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 140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사를

고용하기 위해 쓰이는 군사비나 외세(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하고 평화유지를 위해 많은

 세페를 바쳐야했기에 국가예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거기에 더해서 문인중시주의 때문에 무인은 매우 경시되어 중국 속담에서는 '

좋은 철은 못에 없고, 좋은 인간은 군대에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병사를 모집하기 위한 것에도 고생이 많아, 병사들은 죄인출신자 및

품행이 좋지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채워지게 되었기에 사기 및 규율도 낮아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는 모두 문신이 실시되어 일반 백성들과 구별하게 하였다.

당나라 때까지는 도시는 밤이 되면 문을 닫고, 도시안의 각 지구도 출입을 금지하였으나,

송나라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폐지하여 카이펑은 밤에도 도로상에 상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시에는 사람의 모습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문화
초기에는 [사대서](四大書)라 총칭하는 대부분의 서책 편찬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송나라에 이르러 문학은 당나라 중기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물려받았다.

이 흐름에는 구양수에 의한 송문학의 주류가 되어, 당송팔대가라 불리는 명문가가 활약했다.

팔대가 이외는 황정견, 범중엄, 사마광 등의 이름이 열거된다.

한시(漢詩)에서는 당나라대까지의 서정시에 비해 매우 일상적이고 평이한 서사시(叙事詩)가 나오게 되었다.

또 당나라말기에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사(詞)의 분야도 이 시기에 융성을 맞이했다.

역사분야에서는 신당서,신오대사, 그리고 사마광에 의해 편년체로 기술된 자치통감이 있다.

과거제도의 융성으로 인해 지식인은 대부분 완전히 유교를 기초로 한 인물들이 많아

송나라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유학(儒學)이 강했던 시대였다.

그 유학중에도 도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었는데,

후에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경사업이 진행되었으나,

이 경전의 대부분은 당시 말기였던 인도의 불교상황의 영향을 받아 거의 밀교에 속하는 경전이었다.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강학중심의 불교는 송나라대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실천적인 교의를 가진 선종과 정토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선종은 이 시대에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교는 황실과 인연을 맺어 크게 번영하였다. 또 민간도교였던 진대도교,

태일교, 전진교 등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

송나라 시대는 수묵화, 산수화 분야의 발흥기라 할 수 있어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송나라 시대의 화단에는 2종류의 흐름이 있어 조정이 만든 한림도화원이라

불리는 국립미술 아카데미 속에서 태어난 원체화(院体画)와 민간의

사대부에 의해 생긴 문인화(文人画)등 2개가 바로 그것이다.

또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컬어지는 소철, , 황정견, 채양 4사람을 열거하는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금체라고 불리는 필체를 만들기도 했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현재도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경덕진이 청백자의 생산을 계기로 일대 생산지가 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북송 시대에는 궁정용의 청자, 올리브 녹색의 유약으로 알려진 요주 의

청자 및 백자 최고걸작이 나오던 하북성 , 백지흑

 

 

경제
이 시기에 이르러 강남의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성장하여 화북은 소비사회로써

강남에서 올라온 식료품으로 지탱하는 상황이 되었다.

송나라는 농업, 상업상에서 현저한 변혁이 보인 시기였고, 송나라의 경제력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나라와의 전연의 맹세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재물은 비단 20만필,

은 10만량이라고 알려진 액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액임에는 틀림없으나(은은 일괄적으로 보면 약 11톤),

진종이 봉선의식을 거행할때 사용한 비용은 전연의 맹세에 지불한 액수의 60배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인구는 전한말기이후 전쟁으로 인해 증감을 되풀이하여 인구는 6천만 명을 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북송 때에 이르러 6천만 명을 돌파하고 1080년의 계산으로는 9천만 명에 이르렀다.

그 이후 1억을 한계점으로써 청나라 시대까지 감소와 증가를 다시 되풀이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인구를 지탱한 것은 새로운 농업이었다. 당나라 때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남쪽의 베트남에서 전해진 점성도라 불린 안정성이 있는 조도가 도입되었고,

또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중국 전역의 경제의 중심점은

이 시기부터 확실히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거기에 지역에 따라 차, 과수,

양잠 등의 생산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농업의 분업화가 진행되었다.

식료의 증산에 따라 이것을 운반하기 위한 수운(水運)도 빠르게 발달하였다.

 매우 세밀한 운하망이 구축되어 운하는 전국의  지역을 망라했다.

수도 카이펑은 이 운하를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도시였기에 내부를 운하로 관통할 수 있었다.

또 이때까지 경시했던 해운기술이 대폭적으로 향상되어 정크선이 개발되어 일본,

고려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교역망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자의 증산과 교통망의 정비는 상업을 활발화시켰다. 상인길드가 탄생하고, 상업형식이 정비되었다.

이것과 함께 약속어음이 운용되어 사천, 섬서지역에서는

 세계 최초의 지폐라 할 수 있는 교자(交子)가 발행되어 유통되었다.

 

 

과학기술
송나라 때에는 경제발달과 함께 각종 실용기술도 발전하여 방위자석이 발명되었다.

또 화약, 인쇄기술도 본격적으로 운용되어 사회 각 방면에서 이용되었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이 독점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들 사이에도 퍼져나가게 되었다.

 

 

포청천(포증)
포청천(包淸天, 바오칭톈, 999년 4월 11일 ~ 1062년 5월 20일)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신이자 유명한 정치가이다.

인종 때 동경 개봉부윤으로 재직 중의 판결이 19세기에 석옥곤의 삼협오의 이후 극화되어 알려졌다.

대한민국에는 1994년에 KBS에서 방송한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통해 알려졌다.

102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은 개봉부윤을 거쳐 추밀원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부상서와 이부상서에 추증되고 동해군개국후(東海郡開國侯)에 추봉되었다.

사후 중국 무속에서 신으로도 숭배되며, 사후 지옥 중 5번째 지옥을 주관하는 심판관이 되었다는 전설도 나타났다.

자(字)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호는 청천(靑天),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다른 별칭으로는 포룡도(包龍圖), 포흑자(包黑子), 포흑암(包黑炭)이라는 별칭도 있으며 중국에서는 보통 포공,

포효숙, 포청천 등으로 부른다. 중국 여주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저서로는 포증집, 효숙포공주의 등이 있다.

 

 

생애
출생과 과거 급제

포증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고 관직에 나선 이후로는 청렴한 관리로서 유명했다.

진종 함평 2년 4월 11일에 여주부(廬州府) 합비현(合肥縣: 지금의 안휘성 합비)에서 포원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증(拯)이고 자는 희인이며, 청천(淸天)은 호였다. 위로 20여 세 연상인 친형 2명이 이미 출가해 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들과 비슷한 때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를 지우려 하였으나, 태몽을 꾸고 그만두었다 한다.

얼굴이 검었다고 하며, 드라마에서는 양 미간 사이에 초승달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으나,

실제 그에게는 초승달은 없었다. 어려서 포가촌의 일가, 하인의 자제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하며

아버지 포원외가 들인 독선생을 모시고 수학했다. 뒤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나

1027년(인종 5년)에 정묘과(丁卯科) 진사(進士)시험에 응시하여 장원하였다. 건창현지현(建昌縣知縣) 등을 지내고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임하였다.

 

 

관료 생활
모의 3년상을 마친 뒤 1037년에 관직에 복귀하여 천장현지현(天長縣知縣),

지단주사(知端州使)를 거쳐 감찰어사대행(監察御史代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때

고관들의 부당한 처사를 간하여 탄핵시켰다. 이후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1050년에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를 거쳐 지간원(知諫院)으로 재직 중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씨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였다.

 

 

이후 영주부윤(瀛州府尹)과 양주부윤(揚州府尹)을 거쳐 고향 여주(廬州)의 부윤으로 부임했으며,

이후 다시 지주(池州)·강녕(江寧)의 부윤을 거쳐 1057년 3월 동경 개봉부의 부윤으로 부임, 1060년 6월에 이임하였다.

그가 개봉부윤으로 부임 시 받았다는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는 실제 카이펑에 현존하고 있다.

작두는 사형(死刑) 집행시에만 쓰던 것으로, 용작두는 황족과 왕족, 호작두는 관리와 귀족,

개작두는 일반 평민과 천인에게 적용하던 사형기구였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 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후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1061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사망
1062년 5월 24일에 개봉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포증의 향년 63세였으며,

이때 시중에는 그가 독살당했다는 설이 돌기도 하였다.

인종은 그에게 증 동해군개국후(東海郡開國侯)에 추봉(追封)하고 예부상서(禮部尚書)에 추증했다가

다시 이부상서로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따라서 효숙공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후
사심없는 판결로 유명하였으며 당파에 구애됨이 없고, 고관대작에게 아부,

타협하지 않아 청백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사후 백성들은 그를 그리워하였다.

사후 100년이 지나기도 전인 남송(南宋)과 금(金)나라 때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희극과 시,

문학 작품이 등장하였다. 명나라 때는 수백 권으로 된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

《포룡도판백가공안(包龍圖判百家公案)》 등, 청나라 때는 《용도공안(龍圖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 등이 나타났다.
이 중 1879년에 작가 석옥곤이 《포공안(包公案)》, 《용도공안(龍圖公案)》을 참고하여 120회본으로 축약한

《삼협오의》(三俠五義)가 혼탁한 청나라 말기의 정세에 유행하면서 대중화되었다.

 

삼협오의는 쉬운 문자에 책 중간 중간 그림을 삽입하는 등의

기법을 활용하여 일반 시민들이 쉽게 알아볼수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부터는 청나라,

중화민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 시작하여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연극화 되었다. 한국에는 1993년작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소개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카이펑의 청심루에는 포청천의 대형 동상이 세워졌다.

 

 

평가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사심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쳐 인망이 높았다.

중국 각지의 무림의 고수들이 자원해서 그를 신변보호해주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귀족과 황족, 외척 등에 의한 횡포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고, 강도와 마적떼를 소탕하였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사치하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가 죽자 민중들은 그를 그리워하였고,

 이후 민담과 전승의 대상이 되었다. 고우영 화백의 역사만화 《만화 십팔사략》

(두산동아)에 의하면, 포증은 인권을 짓밞는 구조적 죄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다고 전해진다.

 

 

가족 관계
포원외 : 아버지
포산 : 포증의 형
한씨부인(韓氏夫人): 포증의 부인.
동씨부인(董氏夫人, ? ~ 1068년) : 포증의 두번째 부인.
방리(方璃) : 포증의 조카, 태사 방길의 딸
방욱(方旭) : 포증의 조카, 태사 방길의 아들
이백(李柏) : 방욱의 부인.
포면(包勉) : 포증의 조카
포흥(包興) : 포가촌 주민, 친족

 

대만
포증은 흔히 포청천(包靑天)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대만에서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판관 포청천》과 시나리오를 공유하는 《칠협오의》라는 드라마도 같이 제작되었는데,

《칠협오의》에서 포청천은 주인공이 아니라 오의라 불리는 다섯 형제의 주변인물로서 등장한다.

 

대한민국
1994년에 MBC에서 추석특집 영화 시리즈인 《포청천》을 방영하였다.

그 뒤 1994년 10월 14일부터 1996년 10월 11일까지 금요일 밤 시간대로,

KBS 2TV에서 1993년작 드라마인 《판관 포청천》을 방영하였으며, 1995년 2월 3일에 비디오로 출시하였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에는 iTV에서도 《판관 포청천》을 방영하였으며,

2010년 3월 1일부터 2011년 1월 21일까지 경인TV(OBS)가

 2008년작 드라마인 《돌아온 판관 포청천》을 방영하였다.

 

드라마 속에서 포증은 검은 얼굴에 이마에는 초승달 무늬가 박혀 있는 특징있는 외모로 등장한다.

방영당시 드라마 포청천은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공손책 책사 등의 도움을 받아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포청천 판관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청자들이 불공평한 사회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 포청천을 판관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포청천은 개봉부윤(開封府尹),

즉 당시 수도였던 개봉의 책임자인 시장으로서 재판만 하던 것이 아니라

개봉의 내치까지도 다스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등장 인물
포증(포청천) : 개봉부윤(수도 개봉의 시장)
전조 : 포증의 호위무사. 4품. 무예에 뛰어나다.
공손책 : 포증의 책사.학문이 뛰어나다
왕조, 마한, 장룡, 조호 : 포증의 호위, 전조의 부하.본래 산적이었으나

무사로 존경해오던 전조를 만나고 포증을 섬기게 되었다.

 

칠협오의 : 포증의 조력자로 장남 노방, 차남 한장, 삼남 서경, 사남 장평, 오남 백옥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백옥당이 전조와 라이벌이다.
송나라 황제:청년 황제
태후:황제의 어머니

만화에서의 언급
고 고우영 화백은 만화 18사략(두산동아)에서 포청천은 송나라 시대의 실존인물로,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들에게는 연민을,불의한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고 말한다.

 

 

북송
북송(北宋, 960년 ~ 112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다.

조광윤(趙匡胤)이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송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쫓겨나 남하한 뒤에는 남송과 구별하여 북송이라 불리었다.

 남송과 더불어 송, 송조(宋朝)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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