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여자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16년간 평양에서 살았다. 모국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고, 그곳의 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지만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평양을 떠나 세계를 누볐던 그녀는 이제 여행을 마치고 또 다른 마음의 고향, 서울을 찾았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쿠데타로 아버지를 잃고, 여섯 살 때 평양으로 망명해 16년 동안 살다가 바깥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모니카 마시야스(41)의 삶을 단순히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모니카의 이야기는 그녀의 자서전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국내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그녀는 “내 인생의 10분의 1만 쓴 것”이라며 웃었다.

모니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외국인이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한국말을 했다. ‘이해’를 ‘리해’로 발음하고 이북 사투리 억양을 약간 사용할 뿐 대화를 나누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왜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느냐고 물어봐요. 제가 ‘그냥 좀 해요’라고 하면 보통 실력이 아니라면서 ‘한국에서 배웠어요?’라고 묻죠. 제가 ‘평양에서 배웠어요’라고 답하면 더욱 호기심을 가져요. 왜 평양에 갔는지, 평양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젠 책을 냈으니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웃음).”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보면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이 남한으로 오는 거잖아요. 서울에서도 오래 살았었고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모두 다정하게 대해줘서 고마웠죠.”
책을 펴내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책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원했지만, 모니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제3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북한, 남한을 보는 눈이 이곳 사람들과 달라요. 그래서 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죠. 단지 아프리카의 제 아버지나 김일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정치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죠. 그래서 한국에서 책을 발간하기로 했어요. 제 말뜻을 알아듣고, 마음이 통하니까요.”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써왔던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받아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지난 인생을 회상했고, 가족들과 함께 하루 종일 울었다고 했다.
모니카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적도 기니가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면서 선출된 대통령으로, 10여 년 동안 강경하게 탈식민주의 정치를 펼쳤다. 지지자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던 아버지는 스페인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사촌이자 국방장관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아버지는 삼남매와 어머니를 친분이 돈독했던 김일성 주석에게로 피신시켰다. 그때 모니카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쿠데타군에게 잡힌 큰아들을 위해 다시 적도 기니로 떠났고, 삼남매만 평양에 남겨졌다. 그녀는 언니, 오빠와 함께 평양의 만경대혁명학원 인민학교에 입학해 북한의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귀족 학교로 캠퍼스 안에 병원, 극장, 체육관 등이 모두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삼남매 말고도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서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 온 대통령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모니카 삼남매가 입학한 것은 북한에서 대형 사건이었다.
“원래는 남자들만 다니는 학교였는데 저와 언니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여학생들의 특별반이 만들어졌어요. 만경대혁명학원은 군사 엘리트들을 키우는 학교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교 교육을 시키면서도 규율이 엄격했죠. 아침 6시에 일어나 구보를 하고 줄을 맞춰 교실로 들어갔고, 학년이 높아지면 군사 교육도 받았죠. 아버지를 닮아 자유로운 기질이 있던 저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어요. 그리고 낯선 곳에서 혼자라는 생각에 매일 밤마다 울었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한글을 배웠지만, 음식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평양을 떠날 때까지 떡과 빵만 먹으며 지냈다고 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 인생의 노래도 조용필의 ‘친구여’예요(웃음). 처음 사귄 선화라는 친구가 많은 위로가 됐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친구였는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한번은 자기 집에 데려가 어머니를 소개해줬는데, 선화의 어머니와 포옹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사춘기 무렵이 되자, 모니카는 평양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만경대혁명학원에서도 서클 활동과 같은 소조 활동 시간이 있었는데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배워야 했다. 모니카는 악기를 배우는 대신 춤과 노래에 관심을 보였고 공연 무대에 오르면서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학생이 됐다.
“엄격함 속에서도 학생들만의 즐기는 문화가 있었죠. 특히 대학생 때는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춤장’이라 불리는 디스코텍을 가거나, ‘김치바’라고 부르며 바를 찾기도 했어요(웃음). 물론 유학생이라서 조금 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죠. 하지만 북한이 일부 미국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가장 살기 힘든 곳은 아니었어요. 평양이 낙원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가 억압되는 곳은 아니었다는 거죠. 체제가 다를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했어요.”
모니카는 만경혁명대학원을 졸업한 후 평양경공대 피복학과로 진학했다. 이미 언니 마리벨은 평양의대에, 오빠 파코는 평양건설건재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 훗날 모국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기 위해 진로를 정한 것이었다. 피복학과에서 패션 공부를 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모니카에게 그동안 잊고 살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겼다. 한번은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는 모니카를 보고 유학생 친구가 격분했다. 친구는 그녀에게 “넌 평양에서만 살았으니 바깥세상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고, 이를 계기로 모니카는 바깥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미국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깨닫다
애초부터 모니카 삼남매의 평양 생활은 대학 졸업할 때까지라는 유효 기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김일성 주석에게 맡길 때 약속했던 일이었다. 김일성은 비서실을 통해 모니카의 의향을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했어요. 김일성 주석은 어릴 때 서너 번 만났고 그다음부터는 비서실을 통해 저희를 돌봐줬죠. 만날 때마다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등 잔소리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제게 그는 저희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에요. 삼촌이 저희를 찾으러 평양에 왔을 때에도 그럴 수 없다며 돌려보내지 않았죠. 만약 그때 삼촌을 따라갔다면 제 인생은 많이 바뀌었겠죠.”
23세에 평양을 떠나기로 한 그녀가 선택한 첫 여행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적도 기니 사람들, 특히 실각한 대통령의 딸이 머물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제 자신과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서 살아왔지만 저는 늘 외부인이었고, 그 사실은 다른 나라로 간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면 어디를 가든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죠. 그래서 선택한 스페인에서의 삶은 예상보다 가혹했어요. 아버지는 악마 같은 독재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고, 외국에서 김일성 주석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충격에 충격이 더해져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죠.”
힘든 가운데서도 모니카는 가정부와 보모 일 등을 하며 전공과 영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들을 찾아가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어갔다.
“모든 것의 가치를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 있을 때에는 특별 보호 대상이었기 때문에 돈 걱정을 하거나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쥐어주는 것 대신 스스로 노동의 가치, 돈의 가치를 알고 싶었죠. 아주 힘든 일부터 시작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돈이나 물건을 막 쓰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어요.”
가정부 일을 계속하다 그녀는 전공을 살려 홈데코 매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한국 문화를 접목시킨 데커레이션으로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10년을 살면서, 가장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모니카의 다음 여행지는 미국이었다. 오랫동안 학습된 ‘증오의 나라’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살았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때에 현재 적도 기니의 대통령인 삼촌과 만난 것이다.
“삼촌을 만나기까지는 어려웠지만, 만나서는 그를 용서했어요.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느낀 것은 증오를 할 때 가장 힘든 사람이 저라는 거예요. 몇 년 동안 제 집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꽂혀 있었어요. 하지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그 비극적인 스토리에 불쾌한 감정이 들어서 항상 감춰두기만 했죠. 그런데 삼촌을 용서한 뒤에는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갔어요. 마음이 가벼워졌죠.”
마지막 여행지, 서울에서 고향을 느끼다
모니카의 마지막 목적지는 서울이었다. 평양에서 살 때는 절대 못가는 곳이었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모니카는 벽에 걸려 있는 백두산 사진을 보고 주저앉았다.
“외국인 여자가 백두산 사진을 포고 펑펑 우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더라고요(웃음). 처음 온 곳이었지만 고향에 온 것 같았죠. 물론 평양에 비해 훨씬 현대적이고 화려했지만, 동질감을 많이 느꼈어요. 정치? 경제적인 부분은 당연히 다르지만,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었죠. 친구와 팔짱을 끼고 압구정동을 걸으면서 저는 평양에서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걷던 생각을 했어요. 많은 나라를 거쳐 왔지만, 서울만큼 편안한 기분을 느낀 곳은 없었죠.”
모니카는 “2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만 열심히 했다”며 웃었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 들어간 그녀는 패션 관련 업무를 맡아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친구들이 일만 하지 말고 서울 구경도 좀 하라고 했는데, 바빠도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동대문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한국말을 잘하는 저를 보고 놀라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셨거든요(웃음). 평양에서 그랬듯이요.”
이후에도 그녀는 중국, 홍콩,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녔다. 서울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는 여행은 끝냈으니, 출장을 다닌 셈이다. 그녀는 현재 적도 기니와 스페인 두 곳에 터를 잡고 원단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쉴 때면 조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다닌다. 그녀에게 남은 여정이 또 있을까.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야죠.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때는 남자를 따라가려고요(웃음). 아이에게도 꼭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쳐줄 거예요.” “모든 것의 가치를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 있을 때에는 특별 보호 대상이었기 때문에 돈 걱정을 하거나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쥐어주는 것 대신 스스로 노동의 가치, 돈의 가치를 알고 싶었죠. 아주 힘든 일부터 시작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돈이나 물건을 막 쓰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어요.”
온라인 중앙일보·취재_지희진 기자 / 사진_하지영(studio lamp), 위즈덤하우스 제공
4번째 사진설명
1 모니카는 평양에서 ‘증오의 나라’라고 배웠던 미국을 직접 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났다.
2 엄격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모니카는 대학생이 된 후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3 평양경공대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쿠데타로 아버지를 잃고, 여섯 살 때 평양으로 망명해 16년 동안 살다가 바깥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모니카 마시야스(41)의 삶을 단순히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모니카의 이야기는 그녀의 자서전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국내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그녀는 “내 인생의 10분의 1만 쓴 것”이라며 웃었다.
모니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외국인이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한국말을 했다. ‘이해’를 ‘리해’로 발음하고 이북 사투리 억양을 약간 사용할 뿐 대화를 나누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들은 항상 왜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느냐고 물어봐요. 제가 ‘그냥 좀 해요’라고 하면 보통 실력이 아니라면서 ‘한국에서 배웠어요?’라고 묻죠. 제가 ‘평양에서 배웠어요’라고 답하면 더욱 호기심을 가져요. 왜 평양에 갔는지, 평양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젠 책을 냈으니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웃음).”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보면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이 남한으로 오는 거잖아요. 서울에서도 오래 살았었고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모두 다정하게 대해줘서 고마웠죠.”
책을 펴내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책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원했지만, 모니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제3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북한, 남한을 보는 눈이 이곳 사람들과 달라요. 그래서 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죠. 단지 아프리카의 제 아버지나 김일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정치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죠. 그래서 한국에서 책을 발간하기로 했어요. 제 말뜻을 알아듣고, 마음이 통하니까요.”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써왔던 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받아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지난 인생을 회상했고, 가족들과 함께 하루 종일 울었다고 했다.
모니카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적도 기니가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면서 선출된 대통령으로, 10여 년 동안 강경하게 탈식민주의 정치를 펼쳤다. 지지자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던 아버지는 스페인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사촌이자 국방장관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아버지는 삼남매와 어머니를 친분이 돈독했던 김일성 주석에게로 피신시켰다. 그때 모니카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쿠데타군에게 잡힌 큰아들을 위해 다시 적도 기니로 떠났고, 삼남매만 평양에 남겨졌다. 그녀는 언니, 오빠와 함께 평양의 만경대혁명학원 인민학교에 입학해 북한의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귀족 학교로 캠퍼스 안에 병원, 극장, 체육관 등이 모두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삼남매 말고도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서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 온 대통령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모니카 삼남매가 입학한 것은 북한에서 대형 사건이었다.
“원래는 남자들만 다니는 학교였는데 저와 언니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여학생들의 특별반이 만들어졌어요. 만경대혁명학원은 군사 엘리트들을 키우는 학교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교 교육을 시키면서도 규율이 엄격했죠. 아침 6시에 일어나 구보를 하고 줄을 맞춰 교실로 들어갔고, 학년이 높아지면 군사 교육도 받았죠. 아버지를 닮아 자유로운 기질이 있던 저는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어요. 그리고 낯선 곳에서 혼자라는 생각에 매일 밤마다 울었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한글을 배웠지만, 음식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평양을 떠날 때까지 떡과 빵만 먹으며 지냈다고 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 인생의 노래도 조용필의 ‘친구여’예요(웃음). 처음 사귄 선화라는 친구가 많은 위로가 됐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친구였는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한번은 자기 집에 데려가 어머니를 소개해줬는데, 선화의 어머니와 포옹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사춘기 무렵이 되자, 모니카는 평양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만경대혁명학원에서도 서클 활동과 같은 소조 활동 시간이 있었는데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배워야 했다. 모니카는 악기를 배우는 대신 춤과 노래에 관심을 보였고 공연 무대에 오르면서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학생이 됐다.
“엄격함 속에서도 학생들만의 즐기는 문화가 있었죠. 특히 대학생 때는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춤장’이라 불리는 디스코텍을 가거나, ‘김치바’라고 부르며 바를 찾기도 했어요(웃음). 물론 유학생이라서 조금 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죠. 하지만 북한이 일부 미국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가장 살기 힘든 곳은 아니었어요. 평양이 낙원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가 억압되는 곳은 아니었다는 거죠. 체제가 다를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했어요.”
모니카는 만경혁명대학원을 졸업한 후 평양경공대 피복학과로 진학했다. 이미 언니 마리벨은 평양의대에, 오빠 파코는 평양건설건재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 훗날 모국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기 위해 진로를 정한 것이었다. 피복학과에서 패션 공부를 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모니카에게 그동안 잊고 살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겼다. 한번은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는 모니카를 보고 유학생 친구가 격분했다. 친구는 그녀에게 “넌 평양에서만 살았으니 바깥세상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고, 이를 계기로 모니카는 바깥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미국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깨닫다
애초부터 모니카 삼남매의 평양 생활은 대학 졸업할 때까지라는 유효 기간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김일성 주석에게 맡길 때 약속했던 일이었다. 김일성은 비서실을 통해 모니카의 의향을 물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라고 했어요. 김일성 주석은 어릴 때 서너 번 만났고 그다음부터는 비서실을 통해 저희를 돌봐줬죠. 만날 때마다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등 잔소리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제게 그는 저희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에요. 삼촌이 저희를 찾으러 평양에 왔을 때에도 그럴 수 없다며 돌려보내지 않았죠. 만약 그때 삼촌을 따라갔다면 제 인생은 많이 바뀌었겠죠.”
23세에 평양을 떠나기로 한 그녀가 선택한 첫 여행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적도 기니 사람들, 특히 실각한 대통령의 딸이 머물기에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제 자신과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서 살아왔지만 저는 늘 외부인이었고, 그 사실은 다른 나라로 간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면 어디를 가든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죠. 그래서 선택한 스페인에서의 삶은 예상보다 가혹했어요. 아버지는 악마 같은 독재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고, 외국에서 김일성 주석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충격에 충격이 더해져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죠.”
힘든 가운데서도 모니카는 가정부와 보모 일 등을 하며 전공과 영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들을 찾아가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어갔다.
“모든 것의 가치를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 있을 때에는 특별 보호 대상이었기 때문에 돈 걱정을 하거나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쥐어주는 것 대신 스스로 노동의 가치, 돈의 가치를 알고 싶었죠. 아주 힘든 일부터 시작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돈이나 물건을 막 쓰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어요.”
가정부 일을 계속하다 그녀는 전공을 살려 홈데코 매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한국 문화를 접목시킨 데커레이션으로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10년을 살면서, 가장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모니카의 다음 여행지는 미국이었다. 오랫동안 학습된 ‘증오의 나라’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살았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때에 현재 적도 기니의 대통령인 삼촌과 만난 것이다.
“삼촌을 만나기까지는 어려웠지만, 만나서는 그를 용서했어요.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느낀 것은 증오를 할 때 가장 힘든 사람이 저라는 거예요. 몇 년 동안 제 집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꽂혀 있었어요. 하지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그 비극적인 스토리에 불쾌한 감정이 들어서 항상 감춰두기만 했죠. 그런데 삼촌을 용서한 뒤에는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갔어요. 마음이 가벼워졌죠.”
마지막 여행지, 서울에서 고향을 느끼다
모니카의 마지막 목적지는 서울이었다. 평양에서 살 때는 절대 못가는 곳이었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모니카는 벽에 걸려 있는 백두산 사진을 보고 주저앉았다.
“외국인 여자가 백두산 사진을 포고 펑펑 우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더라고요(웃음). 처음 온 곳이었지만 고향에 온 것 같았죠. 물론 평양에 비해 훨씬 현대적이고 화려했지만, 동질감을 많이 느꼈어요. 정치? 경제적인 부분은 당연히 다르지만,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었죠. 친구와 팔짱을 끼고 압구정동을 걸으면서 저는 평양에서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걷던 생각을 했어요. 많은 나라를 거쳐 왔지만, 서울만큼 편안한 기분을 느낀 곳은 없었죠.”
모니카는 “2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만 열심히 했다”며 웃었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 들어간 그녀는 패션 관련 업무를 맡아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친구들이 일만 하지 말고 서울 구경도 좀 하라고 했는데, 바빠도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동대문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한국말을 잘하는 저를 보고 놀라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셨거든요(웃음). 평양에서 그랬듯이요.”
이후에도 그녀는 중국, 홍콩,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녔다. 서울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는 여행은 끝냈으니, 출장을 다닌 셈이다. 그녀는 현재 적도 기니와 스페인 두 곳에 터를 잡고 원단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쉴 때면 조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다닌다. 그녀에게 남은 여정이 또 있을까.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야죠.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때는 남자를 따라가려고요(웃음). 아이에게도 꼭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쳐줄 거예요.” “모든 것의 가치를 알고 싶었어요. 평양에 있을 때에는 특별 보호 대상이었기 때문에 돈 걱정을 하거나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쥐어주는 것 대신 스스로 노동의 가치, 돈의 가치를 알고 싶었죠. 아주 힘든 일부터 시작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돈이나 물건을 막 쓰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어요.”
온라인 중앙일보·취재_지희진 기자 / 사진_하지영(studio lamp), 위즈덤하우스 제공
1 모니카는 평양에서 ‘증오의 나라’라고 배웠던 미국을 직접 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났다.
2 엄격한 만경대혁명학원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모니카는 대학생이 된 후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3 평양경공대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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