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가 신점숙작가
리틀지구촌 안산 원곡동 다민족 지구 본문
유명인의 이름이나 호로 행정지역명으로 되어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안산의 지역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원구! 안산의 단원구에는 그 유명한 김홍도의 그림이 지하도의 벽면에도 건물의 벽면에서도 볼 수 있다. 단원구! 안산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역명이 김홍도의 호인 단원에서 시작되었다.
어제 유스호스텔동호회에서 회장 이취임식을 안산에서 했었다. 회의를 마치고 다민족이 거주 하고 있는 원곡동에서 리틀 지구촌을 체험하기로 했다. 안산역주변 원곡동으로 이동하는 곳곳에서 세계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원곡동과 안산역사를 이어 주는 지하통로벽에 김홍도의 그림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오늘은 원곡동의 늦 가을 풍광 사진을 곁들여 문화의 도시 안산에서 단원 김홍도에 대해서 알아 보고싶다.
김홍도
김홍도(金弘道, 1745년~ 1806년 이전)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이다.[2]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 주로 어명·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 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상민·중인·천민 등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생애
김홍도 미술세계에 들어오다
멘토 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 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을 이렇게 칭찬한다. “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전기생애 그는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司圃署)애서 종6품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게 된다. 그리고 1776년에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공으로 김홍도는 와서(瓦署) 별제로 임명된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정조와 김홍도 “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후기 생애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김홍도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생활 이후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씁쓸한 노년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한두 살이던 1805년이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교우 그는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과,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 정범조, 정란 등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이들은 전기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서인으로는 홍신유와 같은 여항문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 문인들이 있다. 남인들이나 여항문인, 그리고 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의 풍속화나 진경산수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림의 특징
회화적 성과와 영향
작품
풍속화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는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안산역 본래, 현 안산역과 머지 않은 곳에 기존 수인선의 원곡역이 있었으며, 안산선이 계획될 당시 현 안산선 역명도 원곡역이였다. 하지만, 안산선이 개통하면서 안산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고 기존의 수인선 원곡역은 안산역이 영업을 영업정지 때까지 정차 운행하였다.
개요 당고개 발 안산 행 열차는 이 역에서 시·종착한다. 역명이 안산역이어서 안산 중심부로 이해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중앙역 일대가 비교적 안산시의 중심상업지역이며, 안산역은 안산서부지역에 위치해 있다. 인근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는 원곡동 주택단지 일대와 안산유통상가 사이에 있고, 안산 중앙대로 남단에 위치해 반월국가산업단지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 안산역 버스환승센터는 안산시내, 반월국가산업단지, 시화국가산업단지, 시흥시 시화지구로 가는 대중버스 교통의 거점 역할을 하며, 안산 및 시화 지역을 오가는 인근 시외지역으로 연결하는 대중교통 버스들도 대부분 경유한다. 1989년 11월 1일 화물취급도 개시 함으로 주로 야간에 정기적으로 혹은 부정기적으로 화물열차가 운영되는 역이나 2010년 9월 1일 화물취급 중지되었다. 오이도까지 안산선이 연장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안산선의 시종착역으로 안산역 구내에는 전동차량 검수고가 있다, 오이도역으로 연장된 안산선 끝에 시흥차량사업소에서 수도권 4호선 대다수 열차들이 검수 및 정비를 하지만 경정비 및 일부 검수을 위해 수도권 4호선 및 다른 노선이나 새로운 노선의 일부 차량 및 새로운 차량들이 안산역의 전동차량 검수고를 이용하기도 한다.
역사
역 노선 : 4호선
승차 인원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http://cafe.daum.net/sjs2030 - 비나리투어, 여행이 시작되는곳, 항공권발권,국내여행,해외여행,단체여행.패키지. 허니문,트래킹,비자, 모두투어안산중앙점,세계박람회,산악회해외트래킹,가족여행,37년의 여행경험을 고객 감동으로 남겨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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