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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노예운동가 - 해리엇 터브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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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노예운동가 - 해리엇 터브먼

신점숙작가 2013. 7. 20. 13:04

 

 

  해리엇 터브먼:( 본명 아라민타 로스(Araminta Ross),

1820년 경 ~ 1913년 3월 10일)은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남북 전쟁 때 활동했던 스파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는 탈출 후, ‘지하 철도’라는 반노예 운동가 네트워크와 아지트를 통해 해방 시설 열세 곳을 세워, 노예 칠십여 명을 구하였다.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지하 철도'의 차장으로서 남부에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이후 그는 노예 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도와 하퍼즈페리를 습격할 사람들을 모았으며, 전쟁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메릴랜드 주 도체스터 카운티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수많은 주인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채찍질 당하였다. 어릴 적, 그는 화난 노예 주인이 다른 노예에게 던졌던 철 아령에 실수로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로 인해 그는 평생 발작, 두통, 수면과다에 시달렸으나, 대신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생생한 꿈을 하나님이 계시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이때부터 하비루를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따르면 유대민족을 이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구원한“모세”라고 불렸다)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스파이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콤바히 강을 습격하여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전쟁 후, 그는 은퇴한 후 뉴욕 오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부모를 돌봤다. 병 때문에 편히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후 자신의 도움으로 몇 년 일찍 세워진 흑인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가족과 출생
해리엣 터브먼은 아라민타 “거티” 로스라는 이름으로 노예였던 부모, 해리엣(“릿”) 그린과 벤 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릿의 주인은 메리 패티슨 브로디스(이후 아들 에드워드에게로)였으며, 벤은 메리의 두 번째 남편 앤서니 톰슨의 소유로 메릴랜드 주 캠브릿지 근처 블랙워터 강에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대부분의 미국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확한 출생 시기나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특히 출생 시기에 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 편이다. 역사가 케이트 라슨은 산파를 부른 기록과 다른 사료를 통해 출생년도를 1822년으로 추측했다.한편 진 휴메즈는 “현재 유력한 증거에 따르면 터브먼이 1820년에 태어난 것 같으나,

 

1~2년 후였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다. 역사학 교수 캐서린 클린턴은 터브먼이 자신의 출생년도를 1825년이라고 신고했다 하였으며,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출생년도 1815년으로, 묘비에는 1820년으로 나와 있다. 남북 전쟁 과부 부조금 기록에는 터브먼이 자신의 출생년도를 1820, 1822, 1825년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그도 자신의 출생년도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터브먼의 외할머니 마데스티는 아프리카의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의 조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어릴 적, 터브먼은 자신이 아샨티 족(현 가나에 살던 부족)의 자손이라고 말을 들었으나, 이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할 증거는 없다. 그의 어머니 릿 (백인의 아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은 브로디스 가족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였다. 그의 아버지 벤은 능숙한 목수로 농장에서 목수 일을 도맡아하였다. 그들은 1808년경에 결혼하였으며, 법정 기록에 따르면, 9명의 자식을 가졌다: 1808년생 리나, 1811년생 머라이어 리티, 1813년생 소프, 1816년생 로버트, 1822년생 민티(해리엇), 1823년생 벤, 1825년생 레이철, 1830년생 헨리, 그리고 1832년생 모세 등이다.


릿은 가족을 지키려 애를 썼으나 노예 제도가 그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에드워드 브로디스는 그의 세 딸(리나, 머라이어 리티와 소프)을 팔아넘겨, 영원히 가족들로부터 결별시켰다. 조지아 주에서 온 노예 상인이 브로디스에게 릿의 막내아들 모세를 팔아넘길 것을 제안해 오자, 그는 다른 노예와 자유 흑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 달 간 그를 숨겼다. 또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매매하는 것에 관해 주인에게 맞서기도 하였다. 결국, 브로디스와 “조지아 상인”이 그의 아이를 잡으러 노예 구역에 들어왔을 때, 릿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내 아들을 쫓고 있죠. 하지만 이 집에 들어오는 첫 번째 남자는, 내가 머리를 쪼개 버리겠어요.” 브로디스는 결국 포기하고 매매를 취소하였다. 터브먼의 전기 작가들은 그의 가족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이 그에게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NIGGA 였다.


유년기
어머니가 곧 “큰 집”에서 일하게 되어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어지자, 어린 터브먼이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 5~6세 때, 그는 “미스 수잔”이라는 여자에게 아이 보는 여자로 고용되었다. 터브먼은 아기가 잘 자는지 지켜보는 역을 맡았다. 아기가 깨어나 울기 시작하면, 터브먼은 채찍질을 당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다섯 번을 채찍질 당했던 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상처는 평생 그의 몸에 남았다. 이후 설탕 덩어리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터브먼은, 이웃집의 돼지우리에 5일 동안 숨어 지냈으며, 여기서 동물들의 사료로 배를 채우곤 하였다. 굶주린 상태로, 그는 미스 수잔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 이후 그런 학대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옷을 여러 겹 껴입었으며, 혹여 구타당하려 할 때는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그는 벌을 받는 도중 백인의 무릎을 깨물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간격을 유지하였다.

 

또 그는 어릴 적에 제임스 쿡이란 이름의 대농장주인 아래에서 일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근처의 늪에서 사향뒤쥐 덫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 홍역에 걸린 이후에도 그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차가운 물에 들어가야 했다. 결국 그는 매우 아파져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어머니의 간호 때문에 그는 다시 건강해졌으며, 이와 동시에 여러 농장에 다시 고용되어 일하였다. 터브먼은 이후 그때의 향수병에 대해 얘기하며, 스테판 포스터의 노래를 인용하여 자신을 스와니 강의 소년들에 빗대어 말하였다. 더 나이를 먹고 강해지면서, 그는 힘든 밭과 숲에서의 일을 맡게 되었다.


머리를 다치다
어느 날, 그가 10대일 때 의류점에 보내진 때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허가 없이 농장을 떠난 다른 집의 노예를 만났다. 그 노예의 관리자는, 터브먼에게 그를 잡아둘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이를 거부하고, 노예가 도망치자, 관리자는 그를 잡기 위해 2파운드짜리 물건을 던졌다. 그러나 그 물건은 빗나가 터브먼을 맞췄다. 이후 그는 “한 번도 빗질한 적 없고... 양동이처럼 서있던” 머리카락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리는 상태로 주인의 집으로 돌려보내진 터브먼은, 베틀 의자에 누워 아무런 의학적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이틀간 방치되었다. 이후 그는 즉시 밭으로 다시 내보내졌으며, “보지도 못할 정도로 피와 땀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상태였다. 그의 주인은 그가 “6펜스어치도 되지 않는다.

 

”라며 그를 브로디스에게 다시 보냈으며, 이후 브로디스는 그를 파는 데 계속 실패하였다.이후 그는 발작을 일으키고 의식을 잃곤 하였으나, 그는 그 상태에서도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곤 했던 그는, 가족들에게는 매우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신체 상태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훗날 라슨은 그가 그날의 사건으로 측두엽 발작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한편 이때쯤 그는 종교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문맹이었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성서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초기에 그가 기독교의 어느 종파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터브먼은 하나님에 대해 깊은 믿음을 유지하였다. 그는 노예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데 이용되었던 “백인의 성서”을 거부하였으며, 야훼가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한 이야기인 구약 성서의 출애굽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뇌 손상을 입은 후, 터브먼은 여러 환각과 선명한 꿈을 경험하였는데, 그는 이를 하나님이 내리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이런 종교적인 관점은 그를 평생 이끌었다.

 

가족과 결혼
1840년, 터브먼의 아버지가 전 주인의 유서에 따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신을 소유했던 탐슨 가족 아래서 계속 목재 평가인과 십장(什長)으로서 일하였다.몇 년 후, 터브먼은 백인 변호사에게 5달러를 지불하고 그의 어머니가 가진 법적 지위를 확인해 보았다. 변호사는 전 주인이 릿도 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45세에 자유가 될 것을 명시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릿의 아이들 역시 비슷한 조건이었으며, 45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인 것을 암시하였다. 하지만 패티슨과 브로디스 가족은 그런 사항들을 무시하였으며, 그 일이 실현되는 것은 보는 것은 터브먼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1844년경, 그는 존 터브먼이라는 자유 노동자 신분의 흑인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기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자유롭지 못한 신분 때문에 두 사람의 결합은 복잡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해리엇의 신분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계승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한 다른 신분의 결혼은, 흑인들의 반이 자유였던 메릴랜드 동부 해안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흑인 가족에 자유와 노예 흑인이 섞여 있었다. 라슨은 터브먼 부부가 매매를 통한 방법으로 그의 자유를 사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터브먼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자신의 이름을 “아라민타”에서 “해리엇”으로 바꾸었다. 라슨은 이 일이 결혼식 직후에 일어났다고 하였고, 클린턴은 터브먼이 노예 계급으로부터 탈출하려 할 때 일어났다고 말하였다.새로운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딴 것이었는데, 그밖에도 종교적인 이유 또는 사라져 버린 자신의 누이를 기리기 위한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노예 계급에서 벗어나다
1849년, 터브먼은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노예로서 가치도 떨어졌다. 에드워드 브로디스는 그를 팔려고 하였지만,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다.[35] 이렇게 자신을 팔아 넘기려 하는 주인의 지속된 시도와 자신의 친척들에 대한 부당한 소유권 행사에 분노를 느낀 터브먼은, 주인이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36]

 


"밤새도록 주인 때문에 기도를 했다. 기도는 3월 1일까지 이어졌는데, 그때까지 내내 그는 사람들을 데려와 나를 소개하며 나를 팔아넘기려 했다."

자신에 대한 매매가 거의 성사되려는 단계에 이르자,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


"나는 기도를 바꾸었다. 3월 1일부터 나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오 주님, 만약 그의 마음을 바꾸실 뜻이 없다면, 그를 죽여 제 앞길에서 거둬가주십시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유 혹은 죽음, 둘 중 하나였다.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면, 나머지를 가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1주일 후 브로디스가 실제로 죽었으며, 이로 인해 터브먼은 자신이 이전에 브로디에게 품었던 감정에 대해 후회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로디스의 죽음으로 인해 터브먼은 팔려나가 가족들로부터 떨어질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되었다.이는 브로디스의 아내 일라이자가 노예들을 팔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터브먼은 남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이 브로디스 가족에 의해 결정당하지 않게 하기로 결심했다.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1849년 9월 17일 탈출하였다. 터브먼은 당시 캐롤라인 카운티에서 포플라 넥이라는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던 앤서니 탐슨 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의 형제도 거기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예들이 다른 곳에 가 일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라이자 브로디스는 처음에는 그들의 탈출 사실을 못 알아챈 것 같다. 하지만 2주 후, 그는 캠브릿지 “민주당”에, 노예 셋 중 하나를 잡을 때마다 100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 포스터를 내걸었다.터브먼의 두 형제는 또 나름대로 떠난 후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벤은 아버지가 막 된 참이었으며, 둘은 결국 앞에 놓인 위험에 겁을 먹고 스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로 인해 터브먼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야만 했다.

 

얼마 안 가 터브먼은 이번에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는 탈출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려하였다.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던 매리를 찾아, 암호처럼 쓰이던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보자꾸나, 나는 약속된 땅으로 간다."

 

그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터브먼은 ‘지하 철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광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였다. 이 비공식적이지만 잘 짜여진 조직망은 자유 흑인, 백인 노예 폐지론자, 그리고 기독교인 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공동체로는 종종 퀘이커라 불리는 친우회 조직이 있었다.퀘이커와 메노나이트 교회는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 마이너리티였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성서의 문자에 집착하는 문자적 해석이 아닌 역사적, 사회적 주제들에 근거하여 성서를 해석하는 콘텍스트적(상황적)해석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교회였고, 노예제에 대해서도 성서의 인권사상에 근거하여 투쟁했다.캐롤라인 카운티의 포플라 넥 근처의 프레스턴 지역은 퀘이커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으므로, 터브먼이 탈출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경유해간 지점이라 생각된다.그곳에서 그는 도주 노예들이 일반적으로 택하는 길을 따라갔다: 촙탱크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델라웨어를 지나 펜실베이니아로 북쪽으로 간 것이다.145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여행은, 도보로만 갈 경우 최소 5일에서 최대 3주까지 걸리는 길이었다.

 

여행의 위험한 조건 때문에 터브먼은 밤에만 움직이면서 (북극성을 길잡이로 잡아) “노예사냥꾼”들의 눈을 피해야했다. 지하 철도의 “차장”은 숨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변장을 썼다. 예를 들어 초반의 ‘정거장’ 중 하나에선, 집주인이 터브먼에게 마당을 쓸라고 말하여 마치 터브먼이 그 집의 노예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밤이 오면, 가족은 그를 카트에 숨겨 다음 집으로 옮겨주었다.그가 그 지역의 숲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낮에는 숲 속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택한 경로는 다른 노예들도 탈출시 이용하는 경로이므로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터브먼은 이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얘기를 하였다.

그의 첫 여행 중 몇몇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다.안도감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펜실베이니아를 건넌 그는 몇 년 후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경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내가 아직 같은 사람인지 보기 위해 손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에 영광이 느껴졌다; 태양은 나무 사이에서 황금처럼 나타났고, 나는 내가 천국에 있다 생각했다.

 

모세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후, 터브먼은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터브먼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낯선 땅에 있는 낯선 사람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와 누이, 친구들 모두 메릴랜드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고, 그들 도 자유로워야 할 권리가 있었다.  터브먼은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다. 그때, 국회에서는 도망노예법이 통과되어 전국의 사법관들이 (노예 제도가 불법화된 주에서도) 탈출 노예를 잡는 것을 돕고, 탈출을 돕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때문에 탈출 노예들의 위험은 증가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캐나다로 발을 돌렸다. 한편 필라델피아 역시 도시가 확장되면서 인종차별로 인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1850년 12월, 터브먼은 그의 조카 케시아가 그의 두 자식과 함께 캠브릿지에서 팔릴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의 가족이 더욱 조각나는 현실에 충격을 받은 터브먼은, 다른 노예들은 거의 하지 못하는 일을 감행하였다: 자신이 원래 살던 땅으로 자발적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우선 볼티모어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매부 톰 터브먼이 그를 숨겨주었다. 존 볼리라는 케시아의 남편은 자유 흑인이었는데, 경매에서 자신의 아내를 사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돈을 내는 척하고 있을 동안, 케시아와 그의 자식들은 근처의 피난처로 도망쳤다. 밤이 오자, 볼리는 가족을 통나무배에 태우고 100킬로미터를 여행해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터브먼을 만났으며, 안전하게 필라델피아로 갈 수 있었다.

 

다음 봄, 그는 메릴랜드로 돌아와 나머지 가족들을 빼내려는 결심을 하였다.두 번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 모세와 다른 두 명의 노예를 구해냈다. 이때 터브먼은 윌밍턴의 노예 폐지론자 퀘이커 교도 토머스 가렛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그의 업적을 듣고 그의 가족은 용기를 냈으며, 실제 오늘날의 전기 작가들도 그가 메릴랜드로 올 때마다 더욱 자신감이 커졌을 거라 말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노예 제도에서 구출해내면서, 그는 “모세”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야훼의 뜻에 따라 하비루 즉, 이집트에서 억압과 착취를 받던 민중을 해방한 것에 빗댄 것이다.

 

1879년 작가 윌버 시버트와 한 인터뷰에서, 터브먼은 그가 지하 철도에서 사용하였던 장소와 도우미의 이름을 일부 밝혔다. 그는 메릴랜드의 자유 흑인 목사 샘 그린과 함께 지냈었다; 또 포플라 넥에 있는 그의 부모의 집 근처에도 숨었었다. 거기서 동북쪽으로 가 델라웨어의 샌드타운과 윌로우 그로브를 거쳐, 자유 흑인 요원 윌리엄 브링클리, 냇 브링클리와 에이브러험 깁스가 있는 캠든에 도착하였다. 세 요원은 그를 도버와 블랙버드 지역을 지나 북쪽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다른 요원들은 체사피크와 델라웨어 운하를 지나 뉴캐슬과 윌밍턴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윌밍턴에선, 퀘이커 교도 토머스 가렛이 윌리엄 스틸의 사무실이나 다른 지하 철도 차장의 집으로 그를 안전히 데려다주곤 하였다. 유명한 흑인 요원이었던 스틸은 수백 명의 노예들을 뉴욕,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쪽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준 업적이 있는 사람이다.

 

1851년 가을, 터브먼은 자신의 남편 존을 찾기 위해, 탈출 후 처음으로 도체스터 카운티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는 다양한 직업으로 돈을 모아 그를 위한 정장을 한 벌 산 후 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캐롤라인이라는 여자와 재혼한 상태였던 존은,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하며 함께 떠나기를 권하는 터브먼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터브먼은 한때 그들의 집에 쳐들어가 소동을 벌일 생각까지 했으나, 결국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였다. 분노를 억누르면서, 그는 탈출을 원하는 또 다른 몇몇 노예들을 찾아 그들을 필라델피아로 데려갔다.한편 존은 16년 후 로버트 빈센트라는 백인과 길가에서 말다툼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프레더릭 더글러스: 터브먼과 함께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일하면서 그를 칭송하는 글을 씀탈출노예송환법으로 미국 북부가 탈출 노예들에게 위험한 지역이 되었기에, 많은 탈출자들이 더 안전한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1851년 12월, 터브먼은 11명의 탈출 노예들을 북쪽으로 이끌었는데, 이 그룹에는 볼리 가족과 이전에 탈출을 도와주었던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과거 노예이자 노예 폐지론자였던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집에 머물렀다는 증거도 있다. 더글러스는 "한때 내 집에는 11명의 노예가 머물렀던 때도 있었으며, 그들이 캐나다로 가기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그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내 의무였다. 한번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로는 그게 최대였으며,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음식과 잘 곳을 제공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라고 썼다. 여행자의 수와 시기를 따져보면 이것이 터브먼의 그룹이었을 확률이 높다.

더글러스와 터브먼은 함께 노예 제도에 맞서 싸우면서 서로에 대해 존중을 아끼지 않았다. 터브먼의 초기 전기가 1868년에 출간되자, 더글러스는 그를 기리는 편지를 썼다.

 

당신으로부터 추천의 글을 부탁받았으나, 솔직히 그것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당신의 그런 말들이 필요하죠. 특히 우리를 노예로 묶은 이 땅에서 당신이 이룬 것들과 헌신은, 저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이의 차이는 명백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같으나, 나의 노력과 고통은 매우 공개적이어서, 내딛는 발걸음마다 갖은 격려의 말을 받았지요. 한편으로 당신은, 매우 비밀스럽게 노력해왔습니다. 나는 낮에 일하고 - 당신은 밤에 말이죠. … 깊은 밤의 하늘과 조용한 별들이 당신의 자유를 향한 노력과 영웅적인 행동의 증인이 되주었습니다. 성스러운 기억 속의 존 브라운을 제외하고라면—당신처럼 기꺼이 위험과 고난에 몸을 던져 우리의 사람들을 도운 이를 나는 일찍이 알지 못합니다.

 


여행을 통한 노예 구출 방법
“그는 항상 밤이 길고 어두운, 사람들이 밖에 잘 나다니지 않는 겨울에 우리를 찾아왔다.”
—터브먼을 따르는 사람 중 한 명
 
터브먼은 11년간 메릴랜드 주 동부로 수 차례에 걸쳐 돌아왔으며, 13번의 여행을 통해 70여 명의 노예를 구출했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 헨리, 벤, 로버트와 그들의 아내 및 자녀 일부도 포함되어있었다. 또 약 50-60명의 탈출 노예들에게는 북쪽으로 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그의 이러한 노예 구출 활동은 당시에 매우 위험한 행위였으므로,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이끄는 여행자 그룹이 발견될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보통 겨울에만 주로 움직였다. 또한 탈출자들을 빼내올 때는 항상 토요일 저녁에 마을을 빠져나왔는데, 이것은 신문이 월요일 아침까지는 수배서를 싣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여행은 그를 종종 엄청난 위험에 빠뜨렸으며, 그때마다 그는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위험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한 번은 그가 보닛을 쓰고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들고 심부름을 가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앞에 그의 과거 주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터브먼은 닭의 다리에 묶여있던 끈을 당겨 소동을 벌였으며, 이를 통해 과거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언젠가는 다른 옛 주인이 같은 기차에 올라탄 적도 있었다. 이때 그는 근처에 있는 신문을 빼들고 읽는 척을 하였다. 터브먼은 문맹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는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 마치 직접 귀로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렇게 신의 목소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토머스 가렛
 
메릴랜드로의 거듭되는 여행에 있어 그의 종교적 믿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리 손상으로 인한 환각은 계속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는 종종 “신과의 대화”를 언급하였으며, 그분이 자신을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의 신에 대한 믿음은 또 다른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는 찬송가를 암호로 사용해, 위험한 길 또는 안전한 길을 동반 여행자들에게 알려주곤 하였다.


존 브라운과 하퍼스 페리
1858년 4월, 터브먼은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노예 폐지론자이자 반정부 운동가인 존 브라운을 소개 받았다. 터브먼은 백인에 대한 폭력을 옹호한 적은 없으나, 그는 그의 직접적인 행동 방식에 동의를 하며 그의 목표를 지지하였다. 터브먼처럼, 그도 신의 부름에 관해 말하였으며, 노예 주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신이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다. 한편 그는 이미 그들이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곧 그는 노예 소유자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지지자를 모았고, 여기에는 터브먼도 참여했다. 당시 터브먼은 “터브먼 장군” (존 브라운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지지 세력들에 관한 정보와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델라웨어의 주 경계의 자원에 대한 정보는 브라운이 계획을 짜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등의 다른 노예 폐지론자들은 그의 계획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브라운은 자유 흑인들이 모인 새로운 주를 만드는 꿈을 갖고 군사적인 행동 개시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그는 일단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면 다른 노예들도 이에 호응하여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반란이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캐나다에 살고 있던 자유 흑인들 중 그의 군대에 참여할 이가 없는지 찾아봐달라는 브라운의 요청에 따라 그는 캐나다 지역에서 지원자를 찾았다.

 

1858년 5월 8일, 브라운은 온타리오 주 채텀-켄트에서 버지니아 주 하퍼스 페리 습격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 계획이 정부에 노출되자, 브라운은 잠시 계획을 보류하고 훗날의 거사를 위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터브먼은 그를 도우면서 공격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

 

터브먼은 당시 노예 폐지론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859년 가을,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이 공격 개시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터브먼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10월 16일 하퍼스 페리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몇몇 역사가들은 그때 그가 뉴욕에서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캐나다에서 군대 지원자들을 더 모으고 있었다는 설도 있으며, 케이트 클리포드 라슨은 그가 메릴랜드에서 군대 지원자를 모으거나 또는 다른 가족들을 더 구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을 것임을 주장했다. 라슨은 또 프레더릭 더글러스처럼 터브먼도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격은 실패였다. 브라운은 반역죄로 12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훗날 그의 행동은 많은 노예 폐지론자들에게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는 숭고한 순교자로 기억되었다. 터브먼 역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친구에게 “그는 죽음으로써 100명의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였다."라 말하였다.

 

오번과 마가렛
1859년 초, 노예 폐지론자인 미국 상원의원 윌리엄 H. 수어드가 터브먼에게 뉴욕 오번 외곽에 있는 작은 땅을 1200달러에 팔았다. 그 도시는 반노예주의의 온상이었으며, 터브먼은 그의 부모를 캐나다의 혹한에서 데려나올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도망노예송환법에 의해 그들이 남부로 다시 송환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었으며, 터브먼의 형제들 역시 거부감을 보였다. 캐서린 클린턴은 드레드 스콧 판결 사건으로 인한 분노가 터브먼을 미국으로 다시 데려온 것이라고 보았다. 오번의 그의 지역은 터브먼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몇 년간, 그는 친척들과 다른 흑인들을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주었다.

 

오번 땅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터브먼은 메릴랜드로 가 그의 “조카”인, 마가렛이라는 8살 난 흑인 소녀를 데리고 왔다.이 여행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미스터리에 쌓여있다. 마가렛의 부모에 관한 것도 일치되는 이론은 없으나, 터브먼은 그들이 자유 흑인이었다고 말하였다. 마가렛은 메릴랜드에 자신의 집과 쌍둥이 오빠를 두고 오게 되었다.몇 년 후, 마가렛의 딸 앨리스는 터브먼의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안전한 집에 있던 소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다놓았다.” 실제로, 앨리스는 이 일을 “납치”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클린턴과 라슨 둘 다 마가렛이 사실은 터브먼의 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라슨은 둘의 연결고리가 굳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진 아이의 고통을 아는 터브먼이 자유 흑인 가족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클린턴은 둘의 닮은 외모를 근거로 들었으며, 이는 앨리스도 인식한 사실이다. 두 역사가 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데 동의하며, 터브먼과 마가렛의 관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현재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1860년 11월, 터브먼은 마지막 구출 미션을 감행하였다. 1850년대 동안은 터브먼은 그의 누이 레이철과 그의 두 자식 (벤과 앤저린)을 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도체스터 카운티에 돌아와, 터브먼은 레이철이 죽었으며, 두 아이들은 30달러의 뇌물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겐 돈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노예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후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여행을 헛되이 끝낼 수는 없었으므로, 터브먼은 에널 가족 등의 다른 그룹을 모아, 북쪽으로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노예 사냥꾼들에게서 벗어나는 데는 몇 주가 걸렸으며, 이는 그들의 예상을 웃도는 것이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음식은 얼마 없었다. 순찰대가 가까이 올 때면, 아이들은 진통제를 먹여 조용하게 해야 했다. 그들은 안전하게 오번에 있는 데이빗과 마사 코핀 라이트의 집에 1860년 12월 28일에 도착하였다.

 

 남북 전쟁
북부 연방군의 장군 데이빗 헌터는 남북 전쟁 당시 터브먼과 함께 하면서 노예 폐지론에 관한 관점을 공유하였다.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터브먼은 북부 연방의 승리를 노예 제도 폐지의 핵심 단계로 보았다. 벤자민 버틀러 장군은 예를 들어, 포트 먼로로 들어오는 탈출 노예들을 도왔다. 버틀러는 이 도망자들을 콘트라밴드라 부르면서 급여 없이 기지에서 일하게 하였다. 터브먼 역시 자신의 기술을 연방군을 위해 쓸 수 있길 바랐으며, 곧 그는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노예 폐지론자들과 만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구역으로 향하였다.

 

터브먼은 곧 노예 제도 폐지를 강하게 지지하는 데이빗 헌터 장군을 만났다. 그는 포트 로열의 모든 콘트라밴드들을 자유로 선포하였으며, 전 노예로 이루어진 흑인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은 사실 당시 남부 주에서 노예 해방을 강제할 힘이 없었으며, 헌터의 그런 행동을 질책하였다 터브먼은 링컨의 반응 (그리고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끝내는 것을 망설이는 그의 태도)에 대해 도덕적인 면에서, 그리고 실용적인 면에서 비판을 하였다.

 

“ 신은 링컨이 “올바른 일”을 할 때까지 남부를 구타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링컨 주인님, 그는 대단한 사람이고, 나는 가난한 검둥이에요. 하지만 이 검둥이도 링컨 주인님에게 돈을 모으는 법과 어린 사람들을 구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있죠. 그것은 검둥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저 바닥에 끔찍한, 커다란 뱀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당신을 깨물죠. 죽어가는 당신을 보며 모두 겁먹죠. 당신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에게 가죠. 하지만 뱀은, 아직 거기서 기어다니다, 의사가 치료할 때, 당신을 다시 깨물죠. 그 상처도 의사가 치료를 해주겠지만, 그러는 동안에 또 뱀이 뛰어올라 당신을 뭅니다. 그 뱀은 당신이 죽일 때까지 당신을 깨물 거예요. 링컨 주인님은 이거 하나는 알아두셔야 합니다.”

 

터브먼은 포트 로열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약초로 약을 만들어 적리로 고생하는 군인들을 도왔다. 또 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는데, 그가 전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소문이 더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정부는 그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 급여를 지급하였으나, 새로이 자유가 된 흑인들이 그가 특별대우를 받는다 생각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그는 급여를 포기하고, 저녁에 파이와 맥주를 만들어 다음 날 파는 식으로 하여 돈을 벌었다.

남북전쟁단시 의상↑


정찰과 콤바히 강 습격
1863년 1월 1일 드디어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하였을 때, 터브먼은 이것을 모든 흑인의 자유로 이끄는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하였다.그는 남부동맹의 패배를 위해 일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으며, 얼마 안 가 포트 로열 근처의 지대를 정찰하는 부대를 이끄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늪과 강은 메릴랜드 동부 해안의 환경과 비슷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잠복 이동과 속임수 기술에 대한 지식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그의 그룹은, 전쟁 장관 에드윈 스탠턴의 지휘 아래, 낯선 지형과 그곳의 거주민을 답사하였다. 이후 그는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에게 자신의 여러 지식을 전하면서 잭슨빌의 정복을 도왔다.

“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어요. ”


아직 김이 나는 쌀 한 포대를 메고 달리는 여자들, 어깨에 메여 신음하는 돼지들, 부모들 목에 매달려있는 아기들이 얽히고설키는 혼란을 묘사하였다. 그들의 주인들이 권총과 채찍을 가지고 집단 탈출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그들의 노력은 거의 허사였다. 동맹군이 막 현장에 도착했을 때, 증기선은 이미 노예들을 싣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보포트를 향해 출발한 후였다.

700명 이상의 노예가 콤바히 강 습격을 통해 구출되었다 신문은 터브먼의 “애국심, 총명함, 힘 그리고 능력”을 주요 기사로 다루었으며, 징병 노력으로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 자유가 된 많은 흑인들은 대부분 연방군에 합류하였다.터브먼은 이후 로버트 굴드 쇼 장군의 와그너 요새 습격을 도왔으며, 그의 마지막 식사도 그가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그때 전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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